1-2.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나의 국역은 세조본 언해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수양대군 세조께서는 마지막 ‘걸식(乞食)’을 1~3절의 첫머리에 붙도록 끊어 읽었다.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어떻게 끊어 읽든지 그 의미상에 대차는 없으나 나는 ‘입성(入城)’과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너무 뜻이 반복되므로,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뒤로 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주어의 표현이 달라졌다. 앞에서는 ‘불(佛)’이란 표현을 쓰고, 여기서는 ‘세존(世尊)’이란 표현을 썼다. 둘다 역사적 싯달타에게 쓰였던 칭호, 십호(十號)에 속한다. 불(佛)은 물론 ‘각자(覺者)’라는 뜻으로 그것은 역사적 싯달타에게 국한되지 않는 아주 보편적인 칭호이다. ‘삼세시방제불(三世十方諸佛)’과 같이 ‘진리를 깨우친 성인’ 모두를 가리킨다. 라집(羅什)이 최초의 주어를 불(佛)로 한 것은 불(佛)이 보다 객관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상황이 구체화되면서 주관적 느낌이 강화될 때 이 ‘세존(世尊)’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세존(世尊)은 한어 그 자체로는 ‘세상에서 존귀한 사람’의 뜻이 되지만 산스크리트어 표현의 의미는 좀 다르다. ‘Bhagavat’는 ‘bhaga(행운, 번영)’과 ‘vat(~을 소유한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 의미는 ‘복덕을 구유한 자’의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덕’이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습득이 아닐 것이다. 본시 그러한 모든 복덕을 타고난 존귀한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존칭이다.
『아함경(阿含經)』 『성실론(成實論)』에서는 이 세존(世尊)이란 칭호가 나머지 아홉 개의 호칭을 모두 내포하기 때문에 ‘세존(世尊)’이라 하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을 현장(玄奘)은 음역하여 ‘박가범(薄伽梵)’이라 하였는데, ‘불(佛)’, ‘세존(世尊)’을 따로 두지 않고 처음부터 ‘박가범(薄伽梵)’을 주어로 해서 시작하였다. 범어원문에 더 충실하다 하겠지만 라집(羅什)본의 미묘한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식시(食時)’는 ‘밥 때’인데, 보통 사시(巳時)라 하니 그러면 9시~11시 사이가 된다. 류지(留支)와 진체(眞諦)는 ‘어일전분(於日前分)’, 급다(笈多)는 ‘전분시(前分時)’, 현장(玄奘)은 ‘어일초분(於日初分)’, 의정(義淨)은 ‘어일초분시(於日初分時)’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하루를 삼분(三分)하여 초(初=전前)ㆍ중(中)ㆍ후(後)인식하는 데서 생겨난 표현들이다. 초분(初分)은 새벽 3시부터 아침 9시까지를 말하고, 중분(中分)은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후분(後分)은 오후 3시에서 밤 9시까지를 말한다. 사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침때, 점심때, 저녁때’라는 일반적인 의미 외로 어떤 특수한 의미부여는 없다【제15분 제1절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초분(初分) | 새벽 3시 ~ 아침 9시 |
중분(中分) | 오전 9시 ~ 오후 3시 |
후분(後分) | 오후 3시 ~ 밤 9시 |
내가 생각키로, ‘식시(食時)’는 ‘밥 때가 되어’라는 생활관습상의 표현일 뿐이다. 부처님은 너무 일찍도 늦게도 식사를 할 수 없었으므로 아침식사시간을 9시 정도로 잡으면 무난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절깐의 승려들의 아침 공양시간이 이른 것은 ‘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식은 기원에서 사위성까지 1km를 걸어나갔다 또 걸어돌아오는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내(城內) 주민들의 밥 짓는 시간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의지발(著衣持鉢)’하고 기원정사를 떠나는 시간은 약 새벽 6시경이 되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보라! 새벽 6시 먼동이 틀 무렵, 1,250명의 제자와 불타가 누런 가사를 걸치고 바리를 들고 기원의 정사를 출발하여 사위성으로 향하는 장엄한 모습을! 규모는 물론 더 컸겠지만 낙안읍성 앞 벌교의 너른 들판에 일렬로 1천여 명의 스님들이 줄지어 묵묵히 먼동의 신선한 햇살을 받으며 논두렁 마찻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여기 ‘대성(大城)’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즉 1,250명의 스님들이 매일 걸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읍(城邑)이라면 그 하부구조의 단단한 토대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인류최초의 정사(精舍)가 사위대성 곁의 기원(祇園)이 되었어야만 하는지 그 경제사적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등문공(藤文公)」 상(上)에서 노심자(勞心者, 마음을 쓰고 사는 자)와 노력자(勞力者, 힘을 쓰고 사는 자), 식인자(食人者, 사람에게 밥대접을 하는 자)와 식어인자(食於人者, 사람에게 밥대접을 받는 자)를 말하였다. 이를 계급적 차별구조의 정당화를 꾀하는 반동철학이라 말하기 전에, 인간세상은 분명 힘써(노력勞力, 육체적 노동)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 도올 김용옥도 분명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당에 약간의 채소를 길러 먹기는 하지만, 내가 생산업에 종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내가 먹고 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걸식자(乞食, 밥을 비는 자)와 급식자(給食者, 밥을 제공하는 자)가 존재(存在)하는 것은 맹자(孟子)의 말대로 ‘천하지통의(天下之通義)’다.
생각해보라! 매일 매일 1,250명의 사람이 성안으로 걸식을 하고, 성안의 주민들은 매일 매일 이들을 위해서 밥을 준비해놓고 한 숟갈 퍼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위대성의 모습을! 이것은 남방의 문화요,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종교적 전통이다. 미얀마에 가면 스님들은 모두 걸식을 해서 먹고 산다. 이러한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생소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 사위성의 이름을 이은 오늘 우리 서울성의 모습도 대차가 없다. 아마 서울장안의 교회에 매주 쌓이는 연보돈만 다 합쳐도 서울시 예산의 몇 곱절이 될 것이다. 이쯤되면 서울이 ‘종교도시’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문제는 ‘걸식자’의 도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어마어마한 연보돈이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하는데 쓰여지고 라스포사의 밍크코트를 사는데 쓰여진다면 그러한 종교전통은 문제가 있다. 부처님은 걸식하시고 오직 ‘금강의 지혜’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카필라성의 왕자였던 부처는 보시자들도 많았을 텐데 하필 ‘걸식’의 삶의 형태를 취했어야만 했을까? 그 제1의 정신은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소유’ 정신이다. 이문회(李文會, 자 단우端友, 송나라 진사, 12세기에 활약)는 ‘걸식자(乞食者), 욕사후세비구불적취재보야(欲使後世比丘不積聚財寶也)’[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의 비구스님들이 재산이나 보화를 쌓아놓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여기 ‘착의지발(著衣持鉢)’이라 한 것도 바로 그 뜻이 담겨있다. 비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삼의일발(三衣一鉢)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먹는 밥조차 내가 소유한 것을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과거에 선가(禪家)에서 ‘의발(衣鉢)을 전수(傳授)한다’ 운운한 것도, 그것이 무슨 비전의 대단한 보물이래서가 아니라, 스님이 소유한 것이 ‘삼의일발(三衣一鉢)’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 사람들이 집착하니까, 혜능(慧能)은 자기의 의발을 조계산에 묻어버렸다. 선가(禪家)의 위대성은 바로 그 의발상전의 법(法)조차 없애버린 데서 출발했다는 데 있다. 칠조(七祖)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명칭도 잘못된 것이다. 혜능(慧能) 조사가 구현한 삶의 뜻을 깨닫자는 것이지, 혜능(慧能) 조사가 전(傳)한 선(禪)을 배우자는 것이 아닌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을 여래선(如來禪)과 구별하여 그 상위(上位)의 개념으로 설정한 것은 앙산(仰山)【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백장회해(百丈懷海), 위산영우(潙山靈祐)의 법통을 이은 당나라의 고승. 조사선을 여래선 위에 별립시킴. 위앙종(潙仰宗) 개조의 한 사람. 앙산은 강서성 의춘현(宜春縣) 남방 60리에 있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 걸식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마음의 무소유다. 마음의 비움이요, 앞서 내가 한 말로 다시 표현하자면 ‘문둥이의 겸손’이다. 승(僧) 약눌(若訥)이 주를 달기를 ‘걸식(乞食)’의 본래 의미는 ‘사리교만(捨離憍慢)’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걸식이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걸식과정에는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수모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무분별하게 먹어야한다. 이러한 수모 앞에 끊임없이 마음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수행인 것이다. 현재 미얀마에서 행해지는 습속을 보면, 아침에 나가 얻어온 밥과 반찬을 모두 다시 합쳐서 일제히 나누어 먹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부처님시대에도 그렇게 공양했을 것이다. 한국의 공양주보살님들의 따끈따끈한 요리솜씨의 식사에 비하면, 과히 유쾌한 식사방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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