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석(痛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나는 매우 엄격하고도 신실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우리어머니는 기독교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민족의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개화(開化)의 세기를 사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성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그리고 학교 가기 전에 안방윗목 문턱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면 한 구절당 10원을 탔다. 그리고 못 외우면 종아리를 맞았다.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나의 고전에 대한 소양은 이렇게 해서 길러진 것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기초 소양도 우리 모친이 이렇게 해서 길러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신나게 외운 것으로 ‘산상수훈(Sermo in mont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가장 완정한 형태로 나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여기서도 ‘산에 올라가 앉다’라는 이미지가 나온다. 사실 『금강경』은 기원(祇園)에서 붓다가 아침 한나절에 앉아 설(說)한 것이다. 나는 『금강경』을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병치(竝置)되는 붓다의 ‘기원수훈(祇園垂訓)’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첫머리에 우리가 흔히 ‘비아티튜드(the Beatitudes)’라고 부르는 여덟 개의 ‘유복(有福)’ 시리즈가 나온다. 그 첫 구는 다음과 같다.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나는 어려서부터 이 산상수훈을 신나게 외웠지만,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쉽게 간다. 예수의 역설적 복음의 진리는 돈 없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함이라면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오히려 복이 있다는 멧세지는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사실 마태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유일한 공관복음의 기사인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로 되어 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기사가 마태복음의 기사보다 더 소박한 오리지날한 멧세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하다’, ‘정신이 가난하다’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오히려 복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 것은 동정이나 공감의 여지가 없다. ‘정신의 빈곤’, ‘마음의 빈곤’은 치료되어야 할 상황이지 그 자체로 복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숙제를 풀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소리를 하는 성서주석서를 수백 권을 읽어도 내 마음에 석연하게 해석되어지는 희열을 느낄 수 없었다. 어째서 ‘심령의 가난’이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축복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나는 소꼽장난할 시절부터 품어왔던 이 의문을 1999년 여름 도올서원 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풀게 되었다. 그 열쇠는 바로 『금강경』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 가난한(πτωχοι) 것의 주어로써 쓰여진 ‘마음’에 해당되는 단어는 ‘프뉴마(pneuma, πνεύμα)’이다. 프뉴마는 ‘바람’, ‘목숨’, ‘영혼’, ‘유령’, ‘마음의 상태’ 등의 다양한 함의를 지니는데, 이것은 상키야(Sāṃkhya) 철학에서 쁘라리띠(prakṛti, 물질物質)와 함께 형이상학적 두 원리로 간주하는 뿌루샤(puruṣa, 정신)와 같은 계열의 어원에 속하는 것이다.
프뉴마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결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뿌루샤, 즉 인간존재의 결여인 것이다(‘뿌루사’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프뉴마의 가난은 직설적으로 프뉴마의 결여를 말한다. 그것은 곧 ‘아상의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내어 줄래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보일래야 보일 마음이 없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무아(無我)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함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세울 나’가 없다는 것이다. 곤궁하고 가난하고 찌들리어 핍박을 받지마는, 그러기에 마음이 비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성경(聖經)』에 이를 번역하여,
虛心的人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쉬신더르언여우후우러, 인웨이티엔꾸어스타먼더
라고 한 것은 참으로 통찰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에 대하여 도가적 개념인 허를 썼지마는 그것은 『금강경』적인 ‘무(無)’나 『반야심경』적인 ‘공포’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는 자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애통해 할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온유할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할 수 있는 것이다.
도올은 말한다. 『금강경』을 읽어야 비로소 『신약』이 보인다. 우리는 『신약』을 소승적으로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대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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