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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제일분 - 1.4 收衣鉢 ~ 敷座而坐,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일분 - 1.4 收衣鉢 ~ 敷座而坐,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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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그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잔잔한 영화 속에 클로즈엎 되어 나타나는 컷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하나둘씩 스러져간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번뜩이는 금강의 지혜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 속에서 설파(說破)되었다고 하는 사실의 파라독스. 가장 일상적인데 가장 벼락 같은 진리가 숨어있다고 하는 긴장감을 이 붓다의 행동은 보여 준다. 의발을 거두어들이고,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는 이 모든 평범한 의례가 바로 금강의 지혜에 번뜩이는 자가 바로 금강의 지혜를 설()하려는 그 순간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평범 속에 가린 의미를 좀더 깊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수의발(收衣鉢)’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스님들이 입는 옷을 가사(袈裟)’라고 부르는데 이는 ‘kaṣāya’의 음역인데, 이는 본시 옷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색깔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적갈색으로서 모든 원색이 파괴된 색깔이라는 의미의 괴색(壞色)을 의미한다. 괴색이라면 우리는 먹물이 흐려진 회색(灰色, grey)’을 생각하지만 남방에서는 색소가 주로 나무껍질이나 과즙, 목란(木蘭)에서 채취되기 때문에 자연 적갈색을 띤다. 원래 스님의 가사는 본래 분소의(糞掃衣, pāṃsu-kūla)라고 부르는 것으로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쌌다가 버린 천이나 난지도 같은 쓰레기 집적소에서 주울 수 있는 천쪼가리들을 꿰매어 염색한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지극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우리말의 납승(衲僧)’이란 표현도 문자 그대로 분소의(糞掃衣) 누더기를 입은 승려란 뜻이다. 그렇지만 이런 누더기옷을 깨끗하고 귀하게 다루는 것이 곧 초기승가집단의 윤리였다. 삼의(三衣)는 여러 가지 구구한 설()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바지 한 벌과 저고리 한 벌과 그위에 걸치는 대의(大衣, saṅghātī) 한 벌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도 물론 걸식하러 나갈 때에는 이 삼의(三衣)를 다 걸치고 나갔을 것이다. 돌아와서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이제 깨끗이 씻긴 바리(=발우鉢盂)이 때는 오늘과 같은 목칠기였다기보다는 금속제였을 것이다와 겉옷을 곱게 개, 제자리에 갖다놓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그것을 수의발(收衣鉢)’이라 표현한 것이다. 항상 무엇을 하면 그 원 위치로 매사를 환원ㆍ정돈한다는 것은 모든 공부(工夫)의 원칙이다. 초기승가집단의 이러한 공부(工夫)의 전형, 그 솔선수범하심을 여기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다음 세족이(洗足已)’의 표현에서 ()’는 본동사인 ()’를 수식하는 보어(補語)임은 앞서 걸이(乞已)’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세족(洗足)’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물리적 사실은 부처님과 그의 제자 1,250명이 사위성()을 갔다 왔다고 하는 신체적 행위가 나족(裸足, 맨발)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맨발로 2km이상을 걸어갔다 왔다면 그 발이 누구나 더러울 것임은 뻔한 노릇이다.

 

요한복음13, 예수가 그의 제자의 발을 씻기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면모를 많이 보이는 요한복음에만 유독 이 기사가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길들은 먼지투성이요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때의 사람들이 신는 신발이란 가죽바닥을 발에 노끈으로 묶는 샌달이었다. 당시의 습관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때는 문깐에 물통을 놓고 하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상례였다. 유월절을 앞둔 이 다락방에 모인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하인이 없었다. 이 때 예수는 자신이 몸소 하인의 몸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이미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절박한 최후의 삶의 심정에 있었다.

 

여기 불타는 물론 제자 비구들의 발을 씻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타는 자기 발을 자기가 씻었다. 그런데 이 모습에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실이 숨어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큰스님 정도만 되어도 이러한 행위는 분명 행자 소관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대의 부처세존(世尊)의 위치는 만인(萬人)의 사표(師表)가 되는 그런 지존의 자리였다. 그러나 부처는 자기 발을 자기가 씻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초기불교의 건강한 모습, 각자(覺者)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스스로 조용히 자기 발을 씻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도대체 이 발씻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진도에 가면 싯킴굿이라는 것이 있다. 영혼의 진혼(鎭魂)이지만 씻는다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나의 부인도 내가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손발을 씻기 전에는 무엇을 먹지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발씻음은 그런 위생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런 맥락이었다면 발씻음의 문구가 반식글(飯食訖, 아침밥 자심을 끝내시었다)’ 앞에 가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발씻음은 바로 자리펴고 앉음을 위한 것이요, 바로 진리의 설법을 위한 자리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명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씻음은 더러움을 씻는다고 하는 물리적 행위 그 이상의 제식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4복음서 모두의 벽두에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마가 1:8).

 

우리는 지금 세례(洗禮)’라는 새크라멘트(sacrament, 성례전聖禮典)가 아주 보편화되어있기 때문에, ‘세례라는 제식이 구약시대부터 있어왔던 유대인 고유의 보편적 이니시에이션 세리모니(initiation ceremony)처럼 착각하기 쉽다. 사람을 물에 잠그었다 빼냄으로써 그 순간에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발상의 제식은 유대인전통에는 전혀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럼 이것은 어떻게 오늘날의 기독교의 주요제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이 물의 세례, 물의 신킴굿을 처음 고안ㆍ개발하고 실천한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는 광야의 사나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를 부를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를 붙여서 세례요한(John the Bapti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요한이라는 어떤 역사적 인물은 요단강에서의 세례라고 하는 제식적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대중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이 세례로 이루어지는가? 그렇다! 죄사함이 물에 한번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가능케 되는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엄격성(legalistic rigorism)에 대한 엄청난 반동이었던 것이다.

 

(Sin)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 karma)이다. 죄는 뭐고, 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행위(Deed)인 것이다. 행위란 본시 유형이 아니고 무형의 것이다. ‘도둑질은 그 순간만 모면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거짓질도 그렇고, ‘간음질도 그렇고, 모든 이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존재(存在, 마음) 속에 죄로, 업으로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워하고 신음하고 고해(苦海)를 헤엄쳐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마가1:4) 요한은 외친다.

 

여기 지금 이 요단강 물속에 한번만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죄가 말끔히 씻기고 깨끗한 사람이 된다. 모든 죄가 말끔히 씻기고 온전한 새사람이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복음(Good News)인가! 사람들은 이 복된 소식을 들었다. 예루살렘, 유대아, 사마리아, 갈릴리, 사방에서 이 복음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사실 이 복음에 몰려든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였다.

 

오늘 복음서의 기사들이 모두 예수제자들의 입장에서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관하여 그 정당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선각자였고, 예수는 세례요한의 행위의 민중적 가능성과 그 지지성에서 어떤 삶의 전기를 발견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한마디로, 세례요한과 예수는 바로 대승운동의 동반자요, 친구요, 선후배요, 사제지간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의 길을 준비한 자로서 자기를 낮추었다. 사실 세례요한이 그렇게 낮추었다기보다는 예수의 위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 편의 기자들이 그런 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일생은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의 삶과 죽음의 매우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당시에 민중들에게 메시아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헤롯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요한은 최근에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Qumran) 콤뮤니티와 같은 어떤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것이라는 견해와, 또 당대의 강력한 종교운동집단들의 한 지파였던 엣세네(Essenes)파 계열의 사상가였다는 지적이 있으나 이 모두가 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세례론, 세례운동의 핵심은 매우 명확한 것이다. 최근에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등의 논의로 인하여 우리나라 불교계에 돈(, Sudden Enlightenment)과 점(, Gradual Enlightenment)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무명(無明)의 업()을 씻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점교(漸敎)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돈교(頓敎)가 되는 것이다. 후대에 발전한 사상이지만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종자(種子)의 훈습에 의한 아라야식의 업()을 전환(轉換)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뿐아니라 각고의 요가수행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유식종(唯識宗)을 보통 유가종(瑜伽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식성지(轉識成智)를 위하여 엄청난 요가의 고행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통불교론은 돈()의 입장보다는 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발상! 사람이 한번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죄업(罪業)이 다 씻기고 새사람이 된다고 하는 그러한 발상은, 바로 돈교(頓敎)의 가장 전형적인 발상이다. 바로 요한의 세례운동이야말로 기독교대승운동의 출발인 것이요, 돈교적(頓敎的)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는 율법의 약속과 철저한 지킴의 역정이 요구된다고 말함으로써 특수층의 구원만을 고집하는 제사장이나 아라한에 대한 철저한 반역이요, 비로소 복음이 억압받는 자, 가난한 자, 곤궁한 자, 애통하는 자, 그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금강경의 설법내용이, 칠보를 길에 까는 자들, 화려한 탑을 무수히 세우는 자들, 장쾌한 사원을 무수히 건립하는 자들에 대해, 단지 부처님의 진리 4구게를 암송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야말로 구원의 복음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과 대차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바로 그 모우먼트(moment)가 바로 그 씻김인 것이다. 그것이 세례인 것이다. 예수는 이 세례를 물의 세례에서 불의 세례, 보이는 세례에서 보이지 않는 세례로, 물체적 세례에서 성령적 세례로 바꾼 것이다. 바로 그 불의 세례금강경에서는 사구게송(四句偈頌)의 세례인 것이다. 그것은 곧 영혼의 노래요 성령의 노래요, 영혼이 부정되는 노래요 성령이 부정되는 노래인 것이다.

 

여기 부처님께서 발을 씻으셨다한 것은 단순히 걸식으로 더러워진 맨발을 물로 씻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세례의 전형적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을 설하기 이전에 당신 자신의 모든 죄업을 씻으신 것이다. 불자들은 나의 이런 말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른다. 부처에게 어찌 씻을 죄업이 있을까보냐? 하구.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역사적 불타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해탈한 자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죄업을 짓고 사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매일 매일 발을 씻어야 하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무릎 꿇고 앉아 씻기셨다. 고락을 같이 한 제자들의 죄업을 씻기셨다. 예수의 마지막 싯킴굿이었던 것이다. 자아! 이제 나 도올이 말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자리에 동참하려면 우선 그대들의 발을 씻어라! 요단강에, 갠지스강에 뛰어 들어라! 그대들의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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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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