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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이분 - 2.2 希有世尊 ~ 善付囑諸菩薩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이분 - 2.2 希有世尊 ~ 善付囑諸菩薩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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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세존!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산스크리트 원문을 무시하고 집본(什本)을 그대로 볼 때에 희유(希有)’는 세존(世尊)을 수식하는 형용구로 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의 뜻이 될 것이다. 세존(世尊)은 이미 상설(詳說)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호칭으로 부를 때는 세존(世尊)’이라는 말을 쓰고, 구체적인 문장의 주어로 쓰일 때는 여래(如來)’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집(羅什)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숙달된 맛에서 생겨난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세존(世尊), 여래(如來) 동일한 대상을 여러 말로 달리 부름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또 문의(文義)의 다양함을 꾀하고 있다.

 

여래(如來)’ 또한 십호(十號)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은 불타시대에 자이나교 등 기타 타종교에서도 뛰어난 종교인들에게 붙이는 일반칭호로서 통용되고 있었다. 그것을 초기승단에서 싯달타에게 사용한 것일 뿐이다. 산스크리트 원어 ‘tathāgata’의 어원(語源)이나 원의(原義)는 사실 확정되어 있질 않다. ‘그와 같은(tathā) 경지(gati)에 간 사람이라 하여 보통 존경스러운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는 설이 가장 원의에 접근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그냥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초기불전에서 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에 와서 행하여진 것이다. ‘tathā’그와 같이’, ‘여실(如實)의 뜻이다. ‘gata’갔다의 뜻이고, ‘āgata’왔다의 뜻이다. 교리적 해석으로, 이를 tathā+āgata로 보아 과거의 불()처럼,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왔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tathā’를 여여(如如), 진리(眞理)의 세계로 보아 진실(眞實)로부터 왔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원을 ‘tathā-gata’로 볼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과거의 제불(諸佛)과 같은 모습으로 갔다.’ ‘진리의 세계로 갔다의 뜻이 된다. 전자의 뜻으로 새기면 여래(如來)’가 되고, 후자의 뜻으로 새기면 여거(如去)’가 된다. 그러나 여거(如去)’라는 한역은 드물게 발견된다. ‘여래(如來)’라는 한역술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후한(後漢)의 안세고(安世高). 그 뒤로 여래라고 하면 여여(如如) 즉 진리의 자리로부터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구제자적 성격(Saviorism)을 명료히 띠면서 중국인들의 심상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여기 ()’(well)’이라는 뜻의 부사로서 동사를 수식한다. 한자(漢字)의 고의(古義)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이라는 글자만 보면 무조건 현대어의 선ㆍ악의 선(Goodness)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라는 글자는 본시 그러한 도덕적 이원성을 전제로 한 글자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고 잘 돌아가면선이고, ‘잘 안돌아가면악일 뿐이다.

 

선ㆍ악의 구분이 본시 없는 것이요, 그 구분근거는 이라는 부사적 근거밖에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기 바란다.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쉽게 습합(習合)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중국인들의 언어에 내재하는 이런 생각의 틀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말은 대부분이 원래의 우리 말이 아니요, 서양말에 우리말의 발음적 외투만을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깊게 깨달아주기 바란다.

 

호념제보살(護念諸菩薩)’, ‘부촉제보살(付囑諸菩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이 문맥에 등장하고 있다. 우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두(冒頭)에 이미 언급했듯이, 내가 번역하고 그 뜻을 밝히려는 것은 정확하게 라집(羅什)의 한역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 원본에 의한 의미규정이 선행되는 것이 아니라, 라집의 한문 자체 내에서 형성되어 1,600년 동안 한자문화권의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된 의미체계를 우선적으로 밝힌다는 것이다. 여기의 라집의 번역은 산스크리트 원문의 번쇄함을 아주 축약하여 간결하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기 비로소 최초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다.

 

여기 한문의 뜻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호념(護念)최상의 은혜로 되어있고, 부촉(付囑)최상의 위촉으로 되어 있다. ‘최상의 은혜로 은혜를 입어왔다.’ ‘최상의 위촉으로 위촉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는 라집역(羅什譯)의 내재적 맥락에서 진행될 것이다.

 

호념(護念)’이란 잘 보호하고 잘 생각해주신다는 뜻이다. ‘부촉(付囑))’이란, 요새 우리말로 위촉(委囑)’이란 말과 동일하다. 간단히 말하면 잘 부탁한다는 뜻이다. ‘()’부탁한다.’ ‘맡긴다의 뜻이다. ‘()’ 역시 비슷한 뜻이다. 여기서 잘 부탁한다. 당부한다라는 뜻은 실제로 격려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체의 뜻을 풀면 지금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해주시고(to protect), 잘 격려해주시고(to encourage) 계십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 해석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보살의 의미이다. 왜 여기 보살이라는 말이 등장했는가? 바로 이 금강경의 기자는 방금 탄생한 대승보살의 혁명운동의 대변자로서 수보리를 내걸었다. 여기 수보리는 부처님께로부터 직접 확약을 보장받고 싶은 것이다. 수보리가 최초로 불타에게 던진 말은 대승보살운동에 대한 불타의 보호ㆍ지지ㆍ격려의 확약에 대한 인증이다.

 

부처님! 부처님은 분명 지금 우리 보살대중혁명운동을 찬성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계시죠?”

 

그럼 부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겠는가?

 

그래! 나는 너희들의 운동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격려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아무리 지지하고 보호하고 격려한다 하더래도, 바로 그 보호와 격려를 받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보살운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보살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다. 바로 보통사람들이다. 아라한이 아닌 유정(有情, 의식 있는)의 모든 사람들이다.

 

데모는 왜 하는가? 춘투는 왜 하는가? 정치는 왜 하는가? 그래! 나는 데모를 지지한다! 그러나 데모자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은 데모를 지지한다는 후원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덧없는 소리인 것이다.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 운이 가니 영웅이라 한들 어찌해 볼 도리 없다)!’ 이것은 녹두 전봉준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남긴 최후의 일언(一言)이다. 데모 지지? 그게 다 헛소리인 것이다. 나는 데모를 왜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보살운동을 하고 있는가? 과연 보살, 그것이 무엇인가? 보살! 보살! 보살은 무엇인가? 이 보살의 의미규정, 보살이 과연 어떠한 모습을 지닐 때 보살이 될 수 있는가? 보살이 과연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보살의 의미규정의 핵심을 불타로부터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부처님! 우리는 보살운동을 막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우리 운동을 지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보살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 뭐가 보살입니까?”

 

이에 도올은 말한다: “우리는 지혜 없이 자비를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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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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