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18-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18-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18-6.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 어의운하? 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불?”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이다. ‘법안(法眼)’은 현상계의 형체를 넘어서서 그 다르마(법法) 그 자체를 직시하는 눈일 것이요, ‘불안(佛眼)’은 모든 존재의 구분이 사라진 여여(如如)의 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설명 자체가 구차스러운 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느끼는 대로의 의미가 가장 적합한 의미가 될 것이다.
5절과 6절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다른 주제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11분에서 언급되었던 ‘갠지스강의 모래’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그 상기의 방법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매우 간접적이다. 우리의 기대는 또 ‘갠지스강의 모래’하면 바로 ‘칠보공덕’으로 옮겨 가리라는 예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이 ‘갠지스강의 모래’는 칠보공덕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매우 신선하다! 이 분(分) 전체의 주제는 육안(肉眼)을 넘어서는 심안(心眼)의 문제라는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에 언급되었던 상투적인 개념의 틀을 새롭게 사용하는 자세가 변주의 색다른 다양성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강해, 제십팔분 - 18.8 ~ 是名爲心 (0) | 2022.11.23 |
---|---|
금강경 강해, 제십팔분 - 18.7 ~ 甚多世尊 (0) | 2022.11.23 |
금강경 강해, 제십팔분 - 18.1~2 ~ 如來有天眼 (0) | 2022.11.23 |
금강경 강해, 제십칠분 - 17.12~15 ~ 如來說名眞是菩薩 (0) | 2022.11.23 |
금강경 강해, 제십칠분 - 17.10~11 ~ 是名大身 (0) | 202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