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공자,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다
11-21. 자로가 여쭈었다: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모형제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바른 도리를 듣는다고 곧바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11-21.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엄유가 여쭈었다: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암 그렇구 말구.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하느니라.”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이 이야기를 두 번 다 옆에서 들은 공서화(西)가 말하였다: “유(由: 자로)가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는 공자께서 ‘부모형제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바른 도리를 듣는다고 그것을 곧바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하시고, 구(求: 염유)가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는, ‘암 그렇구말구.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하느니라’라고 대답하시니, 적(赤: 공서화) 저는 당혹하여 감히 여쭙나이다.”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赤也惑, 敢問.”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구(求: 염유)는 평소 물러나기만 하는 성격이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요, 유(由: 자로)는 평소 사람을 앞서 질러 나아가기만 하는 성격이라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니라.”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
교조주의는 하나의 원칙만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모든 종교가 교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획일주의 때문이다. 부활을 믿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부활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기독교사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 오히려 다수였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종교교육을 시켜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교조주의 신념 속에 서 자녀를 키우면 암암리 획일주의자가 되어버려서 중세기적 사회에서는 편했을지 모르지만,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는 적응키 어려운 인간이 되고말기 때문이다. 나는 미성년의 종교교육이란 폭력 중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졸업시까지는 특정한 종교의 교육을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물론 내 말을 안 듣는 것은 자유이지만, 자녀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공자는 교조주의자가 아니다. 종교의 모든 문제를 포섭하되 어떠한 종교의 형태도 교조주의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는 초월(transcendence)과 죽음(death)의 문제를 꼭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상황 속에서 그러한 문제를 융섭(融攝)시키고 있다. 여기 공자의 대답은 후대의 대승불교가 ‘방편설법’을 말하게 되는 그 원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사행저(聞斯行諸)’의 ‘사(斯)’는 ‘즉(則)’으로 해석된다: “들으면 곧 그것을 행해야 하오리까?” 그러나 ‘그것’의 뜻으로 새겨 ‘문(聞)’이라는 타동사의 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뜻이 된다: “이것을 들으면 이것을 행해야 하오리까?” 나는 전자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유부형재(有父兄在)’는 고주로부터 매우 시시하게 해석했다. 뭘 팔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둥 운운. 그러나 지난 세기 7ㆍ80년대 반독재투쟁을 하던 젊은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신데 차마 …’. ‘유부형재(有父兄在)’는 문법적으로 정확히 새기면 ‘부형이 있는 것이 있으면’의 뜻이다. 나는 우리말로 ‘부 형이 살아 있으면’으로 번역했다.
여기 문장의 스타일은 같은 구문을 질문과 대답에서 계속 반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을 반드시 지루한 반복(redundancy)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나름대로 독특한 문체이다. 『논어』의 문체는 대부분 극도의 생략형이며 간결한데 반해 여기는 그 정반대의 스타일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서화의 질문 속에서는 ‘유부형재(有父兄在), 여지하기문사행지(如之何其聞斯行之)’의 후반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나는 번역 속에서 그 생략된 부분까지 다 집어넣었다. 하여튼 반복을 통해, 강조와 재숙고의 여백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다. 후대의 한유(韓愈)와 같은 명문장가들도 이런 반복의 양식을 자주 사용했다.
‘겸인(兼人)’이란 타인을 이기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다.
兼人, 謂勝人也.
장경부가 말하였다: “의(義)를 들으면 당연히 용감하게 실천해야 하지만, 부형이 살아계시면, 외골수로 실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부형의 명을 받지도 않고 행하여 버리면 오히려 의(義)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자로는 들은 바가 있는데도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 들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런즉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요, 항상 실천하려는 의지가 지나쳐서, 명령을 받아야 할 것에 있어서 혹 빠진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만 걱정하는 사람이라. 이에 비하면 염구의 천성은 약하디 약해빠져서 명령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에 있어서 뒷걸음질 치며 위축되어 그것을 행함에 용감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라. 성인께서는 한 명은 나아가게 하고 한 명은 물러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의리(義理)의 한가운데로 집약시켜서, 지나치거나[過] 못 미치는 일[不及]의 병통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張敬夫曰: “聞義固當勇爲, 然有父兄在, 則有不可得而專者. 若不稟命而行, 則反傷於義矣.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則於所當爲, 不患其不能爲矣; 特患爲之之意或過, 而於所當稟命者有闕耳. 若冉求之資稟失之弱, 不患其不稟命也; 患其於所當爲者逡巡畏縮, 而爲之不勇耳. 聖人一進之, 一退之, 所以約之於義理之中, 而使之無過不及之患也.”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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