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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21. 공자,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21. 공자,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6.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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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공자,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다

 

 

11-21. 자로가 여쭈었다: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모형제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바른 도리를 듣는다고 곧바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11-21. 子路: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엄유가 여쭈었다: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암 그렇구 말구.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하느니라.”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이 이야기를 두 번 다 옆에서 들은 공서화(西)가 말하였다: “(: 자로)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는 공자께서 부모형제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바른 도리를 듣는다고 그것을 곧바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하시고, (: 염유)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하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는, ‘암 그렇구말구. 바른 도리를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하느니라라고 대답하시니, (: 공서화) 저는 당혹하여 감히 여쭙나이다.”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赤也惑, 敢問.”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염유)는 평소 물러나기만 하는 성격이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요, (: 자로)는 평소 사람을 앞서 질러 나아가기만 하는 성격이라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니라.”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교조주의는 하나의 원칙만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모든 종교가 교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획일주의 때문이다. 부활을 믿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부활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기독교사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 오히려 다수였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종교교육을 시켜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교조주의 신념 속에 서 자녀를 키우면 암암리 획일주의자가 되어버려서 중세기적 사회에서는 편했을지 모르지만,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는 적응키 어려운 인간이 되고말기 때문이다. 나는 미성년의 종교교육이란 폭력 중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졸업시까지는 특정한 종교의 교육을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물론 내 말을 안 듣는 것은 자유이지만, 자녀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공자는 교조주의자가 아니다. 종교의 모든 문제를 포섭하되 어떠한 종교의 형태도 교조주의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는 초월(transcendence)과 죽음(death)의 문제를 꼭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상황 속에서 그러한 문제를 융섭(融攝)시키고 있다. 여기 공자의 대답은 후대의 대승불교가 방편설법을 말하게 되는 그 원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사행저(聞斯行諸)’()’()’으로 해석된다: “들으면 곧 그것을 행해야 하오리까?” 그러나 그것의 뜻으로 새겨 ()’이라는 타동사의 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뜻이 된다: “이것을 들으면 이것을 행해야 하오리까?” 나는 전자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유부형재(有父兄在)’는 고주로부터 매우 시시하게 해석했다. 뭘 팔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둥 운운. 그러나 지난 세기 780년대 반독재투쟁을 하던 젊은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신데 차마 ’. ‘유부형재(有父兄在)’는 문법적으로 정확히 새기면 부형이 있는 것이 있으면의 뜻이다. 나는 우리말로 부 형이 살아 있으면으로 번역했다.

 

여기 문장의 스타일은 같은 구문을 질문과 대답에서 계속 반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을 반드시 지루한 반복(redundancy)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나름대로 독특한 문체이다. 논어의 문체는 대부분 극도의 생략형이며 간결한데 반해 여기는 그 정반대의 스타일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서화의 질문 속에서는 유부형재(有父兄在), 여지하기문사행지(如之何其聞斯行之)’의 후반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나는 번역 속에서 그 생략된 부분까지 다 집어넣었다. 하여튼 반복을 통해, 강조와 재숙고의 여백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다. 후대의 한유(韓愈)와 같은 명문장가들도 이런 반복의 양식을 자주 사용했다.

 

 

겸인(兼人)’이란 타인을 이기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다.

兼人, 謂勝人也.

 

장경부가 말하였다: “()를 들으면 당연히 용감하게 실천해야 하지만, 부형이 살아계시면, 외골수로 실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부형의 명을 받지도 않고 행하여 버리면 오히려 의()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자로는 들은 바가 있는데도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 들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런즉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요, 항상 실천하려는 의지가 지나쳐서, 명령을 받아야 할 것에 있어서 혹 빠진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만 걱정하는 사람이라. 이에 비하면 염구의 천성은 약하디 약해빠져서 명령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에 있어서 뒷걸음질 치며 위축되어 그것을 행함에 용감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라. 성인께서는 한 명은 나아가게 하고 한 명은 물러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의리(義理)의 한가운데로 집약시켜서,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일[不及]의 병통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張敬夫曰: “聞義固當勇爲, 然有父兄在, 則有不可得而專者. 若不稟命而行, 則反傷於義矣.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則於所當爲, 不患其不能爲矣; 特患爲之之意或過, 而於所當稟命者有闕耳. 若冉求之資稟失之弱, 不患其不稟命也; 患其於所當爲者逡巡畏縮, 而爲之不勇耳. 聖人一進之, 一退之, 所以約之於義理之中, 而使之無過不及之患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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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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