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광 땅에서 시련을 당할 때 안연이 한참 늦게 오다
11-22, 공자께서 광 땅에서 포위되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곤경에 빠져있었다. 이때 안연은 뒤쳐져 있었다. 그가 뒤늦게야 당도하자 공자는 말씀하시었다: “회(同: 안연의 이름)야! 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11-22.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이에 안연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시거늘 저 회(回)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나이까?” 曰: “子在, 回何敢死?” |
참으로 눈물을 자아내는, 너무도 처참한 극한상황에서 너무도 훈훈한 인간의 사랑과 운명의 확신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동경과 믿음이 서려있다. 「자한」 5를 보라! 똑같이 ‘자외어광(子畏於匡)’이라는 특별한 양식적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 편의 제7ㆍ8ㆍ9ㆍ10장이 똑같이 ‘안연사(顔淵死)’로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양식인 것이다. 「자한」 5와 본 장은 외면적으로는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외어광(子畏於匡)’이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주제를 다른 이야기로서 표현한 것뿐이다. 본 편은 제5장과 「옹야」 1B의 관계, 본 편의 제6장과 「옹야」 2의 관계는 동일한 로기온의 다른 전승이라고 본다면, 본 장과 「자한」의 관계는 동일한 테마의 다른 설화 양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자한」 5와 본 장은 본편 7ㆍ8ㆍ9ㆍ10처럼 같이 붙어 있었던 컬렉션일 수 있는데 그 주제의 강렬함 때문에 같은 테마를 분산시켜 여러 곳에서 재현시킴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노리고자 하는 『논어』 전체 편집자에 의하여 안배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11-22와 9-5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주제를 놓고 변주를 시도한 다른 문학인지, 제각기 오리지날한 전송으로 내려오던 것이 전체 편집자에 의하여 ‘자외어광(子畏於匡)’이라는 도입부분만 일치시킨 것인지에 관해서는 명료하게 판단할 길이 없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이 짤막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너무도 눈물겨운 진실한 정황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위험한 상황에서(광 땅에서 양호로 오인되어 갇혀 있었다) 뒤쳐진 안회를 기다리는 스승 공자!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안회! 얘가 정말 죽었구나! 광땅 불한당들에게 잡혀 봉변을 당했구나! 쯧쯧.… 이럴 수가! 이때 헐레벌떡 나타난 안회! 공자는 울부짖었을 것이다: “오~ 안회여!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이때 안회의 대답은 거의 종교적이다. 우선 안회는 공자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신데…’라는 뜻은 선생님은 이렇게 불의의 죽음을 당할 수 없는 분이라는 어떤 종교적 확신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뜻은 안회 본인 스스로가 뒤쳐져 있는 동안 끊임없이 선생님의 안위를 고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계실 거야! 살아계실 거야! 돌아가실 수가 없지! 막상 당도했을 때, 건재하신 스승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신의 신념을 확인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시거늘 저 회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나이까?” 참으로 눈물겨운 말이다. 한 인간이 스승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충직한, 비감 어린 언사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여기서 돌아가실 수가 없다고 하는 그의 종교적 신념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인격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바로 공자가 몸에 지니고 있는 사문(斯文)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이(斯) 문(文)이 당신에게 있사옵는데 어찌 하늘이 당신을 버리시오리이까? 그리고 당신이 살아계신데 어찌 제가 감히 죽을 수 있으오리이까? 이것은 ‘하늘이 이 문(文)을 정녕코 버리지 않으신다면 광사람인들 감히 나를 어쩌랴[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는 공자의 외침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안회는 공자보다 먼저 이승을 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11-8)라는 공자의 절규, 절망을 이 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도올은 본 장을 너무도 사랑한다.
‘女’는 여(汝)라고 발음한다. ○ ‘후(後)’는 난리통에 서로 잃어버려서 뒤에 처진 것이다. ‘하감사(何敢死)’는 전투에 달려가도 결코 죽을 수는 없다는 결의를 말한 것이다.
女, 音汝. ○ 後, 謂相失在後. 何敢死, 謂不赴鬪而必死也.
호인이 말하였다: “선왕의 제도에 의하면 백성이 세 가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아버지 날 낳으시고, 선생님 날 가르치시고, 임금께서 날 먹여주신다[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그러므로 이들을 한결같이 섬긴다. 단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목숨을 바친다라고 되어있다(『국어』권제7, 「진어」 1). 하물며 안연의 공자를 섬김이랴? 은(恩)과 의(義)를 겸하여 다하였고, 또한 타인들이 선생ㆍ제자됨과는 차원이 달랐다. 부자께서 불행하게도 난을 당하셨다면 안회는 반드시 목숨을 버리면서 싸움에 달려들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달려들어 요행히도 살아남았다면, 반드시 위로는 천자(天子)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방백 (方伯)에 고하여 토벌하여 복수할 것을 청하였을 것이며, 그대로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께서 살아계시다면, 안회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아니 하고 광인들의 칼날에 맞부딪칠 까닭이 있겠는가?”
胡氏曰: “先王之制, 民生於三, 事之如一. 惟其所在, 則致死焉. 況顔淵之於孔子, 恩義兼盡, 又非他人之爲師弟子者而已. 卽夫子不幸而遇難, 回必捐生以赴之矣. 捐生以赴之, 幸而不死, 則必上告天子, 下告方伯, 請討以復讐, 不但已也. 夫子而在, 則回何爲而不愛其死, 以犯匡人之鋒乎?”
문의(文義)를 완전히 곡해한 졸렬한 주석이다. 주희가 호인의 형편없는 주석을 인용하고 그 논리에 의해 또 자기도 멘트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면 때로는 주희라는 사람의 인식능력에 회의가 가기도 한다. ‘어찌 감히 제가 죽을 수 있겠나이까’라는 안회의 눈물어린 절규가 그래 고작 ‘살아계신데 제가 광놈 들하고 싸울 일 있겠습니까’정도의 의미로 해석이 되는가 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둥, 복수를 하겠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어찌 우리가 송유들의 수준에 의하여 21세기 유학을 건설할까보냐! 희의 집주는 하나의 레퍼런스일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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