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편견에 갇히지 않고 시를 봐야 하는 이유
길고 길었던 『소화시평』 선독(選讀)의 대망의 마지막 편이다. 작년 1학기부터 시작하여 지금에서야 끝장에 이른 것이다. 권상에선 55편의 시화를 읽었고 권하에선 48편의 시화를 읽었다. 물론 아직 64번과 66번 글을 빠뜨리고 오는 바람에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권의 마지막 편의 글을 정리하는 이 순간의 기분은 매우 좋다. 어쨌든 한문을 오랜만에 다시 공부하며 뭣도 모른 상태로 달려들었던 것이 이런 과정을 통해 마무리 지어지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소화시평을 마친 소회는 64번과 66번 글까지 마친 후에 본격적으로 적어보기로 하고 여기선 마지막 글을 쓰는 느낌을 이렇게 간단히 남겨본다.
『소화시평』 권하 92번에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원진이란 작가가 나온다. 물론 한문학사 상으로도 시인의 명성으로도 그렇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홍만종이 소화시평에 그의 시를 실은 이유는 사람의 명성이 높낮이에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시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만종은 그의 시를 인용하고 이 시를 인용한 이유를 ‘호방하고 굳세며 얽매임에서 벗어나 남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했다[豪健脫纏, 道人所未道].’라고 들고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시가 명성으로 얻어질 수 있는가?
詩可以名取之乎?
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명성이나 배경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우린 애써서 일류 대학을 나오려 하고, 남들도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려 하니 말이다. 그곳을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굳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장광설을 펼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실력이라 믿으며 ‘저 사람은 엄청난 사람이다’라 인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욕망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홍만종은 이번 편에서 그런 인식에 딴지를 걸고 있다. 이 당시에도 흔히 명성에 따라 그 사람의 시적 재능이나 능력을 평가하는 일이 많았었나 보다. 그러니 명성만 듣고도 그 사람이 지은 시는 좋다고 평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명한 사람은 끝없이 유명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능력이 있었을지라도, 시적 재능이 있었을지라도 드날릴 기회조차 없이 사라진 뭇 사람들에 대해 홍만종도 불편한 심기를 지니고 있었던가 보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말을 통해 ‘명성이 있음 = 좋은 작품을 써냄’이란 일반적인 패턴에 딴지를 걸며 꼭 그렇지만 않다고 힘주어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이해의 어려움에 대해’라는 글에서 말했다시피 편견이나 일반적인 패턴에 따라 작품이나 사람을 이해하는 건 너무도 쉽다. 거기엔 제대로 보고자하는 노력이 없더라도 명성에 따라, 일반적인 상식에 따라 이야기를 하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감상에 불과하기에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어 있다. 그건 작품이나 사람에 몰입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만 못하다. 알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히 궁금하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며 그럴 때 우린 놓친, 겉 넘은 본래면목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번 편에서 홍만종이 이 시를 소개하며 ‘호방하고 굳세며 얽매임에서 벗어나 남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했다[豪健脫纏, 道人所未道].’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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