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의 역사에 담은 인생 철학
『소화시평』 권하 92번에서 이원진은 한고조 유방을 주제로 해서 초한쟁패 초반기에 함곡관에 항우보다 먼저 들어갔음에도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지 않고 약법삼장을 선언하며 항우를 기다리던 순간을 배경으로 시를 쓰고 있다.
잠시 삼천포를 좀 빠지자면 소화시평을 공부하면서 유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 발표였던 권상 39번에서도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다뤘었고 권상 47번도 발표를 맡았었는데 여기서도 전횡장군 이야기가 나오며 간접적으로 유방과 밀접한 이야기를 다뤘으니 말이다. 이렇게 유방의 이야기를 두 군데서 다루고 나니 초한쟁패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더라. 이래서 발표를 준비하며 역사적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 다방면으로 함께 공부하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한 번 정리해두면 다음에 이 인물과 관련된 일화들이 나올 때 그나마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으니 말이다.
山東隆準氣雄豪 | 산동의 큰 코 유방은 기상이 웅혼하여 |
一約三章帝業高 | 한번 약법삼장을 약속하니 제왕의 업이 높아졌다네. |
莫道入關無所取 | 함곡관에 들어가 취한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 |
祖龍天下勝秋毫 | 진시황 천하가 가을터럭보단 나으니. |
1구에선 유방이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습할 땐 솔직히 이 구절 자체가 유방에 대한 설명인 줄은 피상적으론 알겠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해석하는 걸 들어보니 그 느낌이 확실하게 오더라. 그건 ‘융준(隆準)’이란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었어야 했다. 그건 『사기(史記)』의 「고조본기(古祖本紀)」에서 확실히 ‘고조의 사람됨은 콧날이 우뚝하고 용의 얼굴을 하고 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쓰여 있으며 이 기록 이후론 유방을 표현할 때 ‘융준(隆準)’이나 ‘용안(龍顔)’을 대표어로 쓰는 사례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물론 ‘용안(龍顔)’ 같은 경우는 이후로 왕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익숙히 알고 있었지만 ‘융준(隆準)’이란 단어는 여전히 생소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 편을 통해서 이 단어를 확실히 알게 됐으니 최고의 수확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2구에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포함으로 제왕의 업이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다. 약법삼장을 선포했다는 말엔 두 가지 역사적인 사실이 들어 있다. 진나라의 폭정에 맞서 일어선 사람들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곡관에 먼저 들어가 진나라 제왕을 죽이고 함곡관을 차지하면 승기를 잡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곡관에 먼저 들어간 유방의 부하들 중엔 항우가 도착하기 전에 함곡관을 점거하고 실력행사를 하자고 제안하는 부하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동의 농사꾼 아들에 불과한 자신의 세력이 초나라 명문 가문 항우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나라의 백성들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의 세력을 더 약화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고, 이렇게 세 가지의 간단한 법률을 제정함으로 신하들이 진나라 백성들을 유린하거나 진나라 유물을 약탈하는 행위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나라 백성들은 처음엔 유방을 자신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정복 군인으로 보았다가 차차 마음이 누그러지며 ‘저 사람은 우리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2구에서 말한 약법삼장을 약속함으로 제왕의 업이 높아졌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3구에선 그런 정황을 토대로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 유방이 함곡관에 들어가 아무 것도 취한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라는 강인한 어조로 말이다. 위에서 쭉 얘기했듯이 유방은 함곡관에 들어가 아무 것도 취하질 않았다.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가지도, 아방궁의 기물들을 가져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방은 함곡관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았다’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왜 지은 이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4구에서 나온다.
4구에선 알쏭달쏭하게 ‘진시황의 천하가 가을터럭보다 낫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건 유방이 함곡관에 들어가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음으로 오히려 진시황의 천하를 가지게 됐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 얘기를 읽고 있으니 체 게바라가 떠올랐다.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 바티스타군을 물리치며 혁명을 성공하여 최고의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 됐음에도 그걸 내팽개치고 다시 혁명의 불꽃을 불사르러 볼리비아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은 성공했지만 막상 그곳에서 열매를 따먹지 않음으로 그는 많은 걸 잃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놓고서 떠난 덕에 그는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에게 ‘혁명의 아이콘’으로 남으며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처럼 유방 또한 작은 성취에 빠져들어 달콤한 열매를 따먹었다면 그는 결코 한나라의 고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민심이 떠나가며 그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광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이익을 탐하지 않은 덕에 더 크나큰 진나라의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원진은 유방의 이야기를 통해 더 너른 시각으로 인생을 대하고 작은 이익에 함몰되지 않은 인생을 살길 바라며 이 시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이와 같은 인생의 철학을 담았으니, 홍만종이 ‘호방하고 굳세며 얽매임에서 벗어나 남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했다[豪健脫纏, 道人所未道].’라고 평가한 것이 어찌 과한 평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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