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어려움에 대해
『소화시평』 권하 91번에서 우린 ‘이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든, 어떤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든 이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학교에서 주구장창 작품의 이해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게 뭐가 어렵나요?’라고 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간을 작품의 이해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배워왔고 대학교나 대학원까지 들어가면 더 긴 시간을 할애하여 배우게 된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배웠다면 당연히 ‘이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교에서 배운 이해의 방법은 결코 제대로 된 이해의 방법이 아니다. 작품을 볼 때 문단별로 나누고 문단별로 핵심내용을 요약하며 거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주제를 찾아내는 방식이 바로 학교에서 주구장창 가르치는 이해의 방식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정답이 정해진 시험에 한정되어 구성된 것일 뿐 작품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작품을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단편적인 지식인 쌓였을지 몰라도 작품이 지닌 원래의 의미와는 멀어지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품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그 작품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알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애정을 지닌 상태에서 작품을 천천히 읽어가며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들,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애초에 정답이란 게 없고, 그 작품이 전해주고자 하는 명확한 한 가지 메시지란 것도 없다. 그러니 ‘핵심주제’니 하는 것들에 얽매여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가다 보면 예전엔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도 보일 것이고, 쉽사리 생각하던 것들도 남달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때에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소통에 대해 “저 사람과 나는 원래 99%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겨우 1% 이해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기에, 그걸 단서로 삼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 밖에 이해를 못했다고 화를 내거나 상대방이 꽉꽉 막혔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만족하면 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린 흔히 100%가 소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치다 선생은 그런 상식을 매우 비합리적인 신념이라 말하고 겨우 1%만 소통하게 되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즉, 소통과 이해의 밑바닥엔 ‘우린 애초에 소통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이해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우린 애초에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걸 인정하고 그저 알고자 하는 진심으로 조금이나마 알려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단재학교에서 근무할 때 이와 유사한 경험을 많이 했다. 학교엔 여러 다양한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니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대로 학생들에게 무작정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서로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기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나 또한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에 살아왔던 방식, 지식, 편견 등을 접어놓고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기 전엔 ‘저런 식으로 행동해서 어디 살 수나 있겠어’,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들어 그걸 그대로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고 조금씩 알게 되는 부분들이 있자 학생들 또한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니라, 그럴 만한 사정과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들을 알게 됐다. 물론 겨우 1%를 알게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전히 실망감에 휩싸일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나아진 부분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학생들과 5~6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니 그제야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함께 지내며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그래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이든 소통이든 알고자 하는 마음, 통하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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