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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6장 - 4. 양극단을 포괄하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6장 - 4. 양극단을 포괄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9. 1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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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양극단을 포괄하다

 

 

극단적인 논리에 갇히지 않고 양극단을 포괄한 후에 말하다

 

그 다음에 집기양단(執其兩端)’ 한다고 했는데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되어 있죠. “오유지호재 무지야(吾有知乎哉 無知也).”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는 내가 정말 인텔리라 할 수 있느냐. 나는 사실 무지(無知)한 놈이다라는 겸손의 뜻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자꾸만 아는 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한다. 내가 그렇게 현학적인 인간이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를 변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에서 대부분이 후자의 해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무지(無知)의 내용을 그 뒤에 해설하고 있습니다. ‘비부문어아(鄙夫問於我)’ , 항간의 보통사람들이 나에게 질문을 잘 던지는데. 공자를 읽을 때 나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공자가 이해가 가능합니다. 나도 제자를 거느리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유명한 사람이어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내게 달려와서 질문을 해. “,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로 시작하면서 나를 자주 만났던 것처럼 말을 건다고.

 

그러면 그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겠어요? ‘공공여야(空空如也)’, 무기탄(無忌彈)하게 달려드는 소인배들이 많고 심지어는 골빈 새끼들뿐이다 이거야. 그런데 보통 골빈 얘기라는 것은 얘기가 극단적이예요. 양면을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그냥 돌격해 와버려! “선생님, 책에 이렇게 쓰셨는데 말이 됩니까?” “전에 테레비에 나와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때, 옛날이나 요새나 다 똑같지? “그럴적에는 그 양극단적인 면을 잡아서 확 조져버린[我叩其兩端而竭焉]”다는 거야. 중용(中庸)의 자리에 서서 걔들의 여러 측면을 파악해가지고 단박에 끝내버린다는 겁니다. 니가 이런 말을 해? 그럼 나는 저런 말로 탁 받아쳐 가지고 다시는 두 말할 수 없게 콱 조져준다 이거야. 이게 중용(中庸)의 파워예요. 공자도 그런 상황의 다이내믹스를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체험한 사람일 겁니다.

 

원래 논어(論語)의 이 구절은 공공여(空空如)를 공공여(悾悾如)로 대치하여(劉寶楠說) ‘성실하고 간절한 모습[誠懇貌]’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항간의 보통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모습이 순박하고 간절하다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비부(鄙夫)’라는 의미가 잘 전달 안 될 뿐아니라 특별히 이런 명제를 구성하게 된 다이내믹한 내재적 맥락이 사라져 버려요. 이 구절을 나처럼 해석한 사람은 2천여 년 동안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만큼 인간의 상상력은 빈곤하고 주석이 한번 성립되면 고착되어 버리고 맙니다. 허나 여러분들이 내 해석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분명 내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고 이 말이 발출되게 된 이유가 설명됩니다.

 

 

 

 

 

양극단에 대해

 

집기양단(執其兩端)’이란 말을 보세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식으로 모든 인간세의 역사는 극단적 아규먼테이션에 의해 흘러가는 경우가 파다합니다. 80년대 PDNL이니 하는 논쟁도 전부 이런 거예요. 게다가 같은 좌에서도 민민투니 자민투니 또 나뉘고, 같은 우에서도 극보수니 진보적 보수니 어쩌고모든 게 양단이란 말이에요. 역사에 대죄를 지은 쾨쾨 묵은 추저분한 퇴물들이 여태 살아 가지고 일선에서 정치를 운운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빨리 영예스럽게 자결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신문에 그런 부끄러운 얼굴들이 나와 설치는 것을 보면 참 우리역사가 불행한 역사라는 생각만 들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집기양단(執其兩端)은 천하를 다스리는 방식에서의 양단(兩端)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요·순 같은 사람들이 천하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允執厥中]’는 계약 위에서 수수 받고 전수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치자(治者)는 천하에서 제기되는 모든 양단을 잡아서 거기에 맞는 중()을 백성에게 적용한다 이 말이에요. 이건 단순히 편파적이지 않고 한가운데서 무게나 잡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양극단면까지도 다 포괄한 굉장한 다이내미즘이 있는 말이라 이거죠. 요새 정치라는 게 한가운데서 무게 잡는다고 요리저리 인선이나 하고 앉았고 쓰잘 데 없는 이견들의 조정이나 하고 앉어 있는 건데 그런 건 중용(中庸)의 정치가 아녜요. 중용(中庸)의 정치란 모든 과격한 양단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권위를 가지고 역사의 정의를 구현해나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기사이위순호(其斯以爲舜乎)’ 그렇기 때문에 순()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순()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천하 다스리는 치자(治者)는 중용(中庸)적 능력이 없이는 절대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이거야. 다양한 양단들이 치고 들어올 때 항상 신출귀몰하게 그것에 대응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 치고 받아서 끝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 능력이 있어야 그게 진짜 대통령깜(治者)인데, 이건 원 참 창피한 수준의 인간들만 정치를 한다고 까불고 있으니……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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