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치다쌤이 글에서 밝힌 ‘맑시스트Marxist’와 ‘맑시안marxian’을 구분한 글을 인용했다.
맑시스트와 맑시안의 차이
맑시스트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사상적 입장으로 해서 그 개념, 술어를 분석의 기본적인 도구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에 맑시안은 마르크스의 지견을 이해하고 그 뜻에 경의를 품지만 그 술어와 개념을 분석을 위한 주요한 도구로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맑시스트와 맑시안은 어떻게 다른가?」, 우치다 타츠루, 박동섭 역
‘맑시스트’란 맑스의 사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여 그걸 그대로 추구하려는 사람을 말하며, ‘맑시안’은 맑스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사상이든 신념이든, 철학이든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정신은 높게 사되,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여 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임제록臨濟錄』에도 이와 비슷한 경구가 있다.
도반들이여! 법의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
道流! 儞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예전 선사들도 어떤 ‘옳음’ 또는 ‘진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나 보다. 지금도 진리라고 박박 우기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이론들이 있으니, 예전이라고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 위의 경구에서 느껴지는 건 어떤 결연한 의지이자, 약동하는 생명력이다.
맑시안들의 유쾌한 반란
그런데 아주 파격적이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 지금 들어도 섬뜩하지만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갈’ 줄 아는 의연함이 보이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길에서 마주치는 온갖 영향력 있는 단어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 영향력 있는 철학들을 모두 가차 없이 죽이라고 하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 죽인다는 표현은 실제로 칼부림을 하라는 표현은 아니고, 정신적으로 칼부림 이상의 죽일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표현이다. 부처든, 조사든, 맑스든, 레비나스든 어떤 순간엔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양분을 줘서 의식을 고양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머물러 그런 것들을 ‘하나의 완벽한 상像’으로 굳힐 경우, 그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다른 것들을 옥죄기 시작한다. 그러니 만나서 감화를 받았으면 거기에 머물려 하기보다 어느 순간엔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외부의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자재로이 나갈 수 있다.
연암 박지원도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라는 글에서 ‘정신을 본뜨는 것心似’과 ‘모양을 본뜨는 것形似’의 비유를 통해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 멀게는 당나라의 임제의현과 조선의 연암, 가깝게는 일본의 우치다, 한국의 박동섭이 각자의 언어로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혁신’이란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아도 학교가 ‘행복한 배움의 공동체’가 되는 것, ‘무능한 교사라 딱지를 붙이며 배척하지 않아도 교사들이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곳’이 되는 것, ‘폭력학생을 솎아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따스한 곳’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게 아닐까. 그러려면 해야 될 일은 ‘단어’를 통해 하나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부터 그러한 작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 따뜻한 교육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이신 선생님들. 그대들이 희망입니다.
동섭안이 되어 박동섭을 관통하라
더불어 이번 후기의 제목을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로 정했다. 이 말 또한 위에서 했던 얘기의 연장선에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박동섭을 만나면 박동섭을 죽여라’인 것이다.
관통한다는 것은 동섭쌤이 지닌 학문의 깊이, 또는 학문의 열정, 비고츠키에 대한 마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속속들이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동섭쌤이 “나 또한 90%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여받았고 거기에 10%만 나의 관점을 얹어 전달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했던 말처럼, 우리 또한 그에게 많은 것을 증여받아 다른 사람에게 증여해주면 된다. 그런 다음엔 가차 없이 박동섭을 죽여야 한다. 이 말을 좀 더 순화하여 표현한 말이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인 것이다.
그럴 때에야 내가 지닌 지적 도량형이 커져 예전엔 미처 들리지도, 인식되지도 않았던 것들이 들리고 인식되기 시작한다. 즉, 언어꾸러미가 생겼기 때문에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것 이외의 것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 끝나고 뒷풀이에 참석하기 위해 에듀니티에 왔다. 대표님이 선물을 주시네~ 완전 횡재했네. 횡재했어~
움직이는 연구소, 동섭쌤을 축하하며
올해 3월부턴 ‘신라대 교수 박동섭’이 아닌 ‘독립연구자 박동섭’으로 새롭게 발돋움한다. 이 날 뒷풀이 장소로 옮길 때 “그러면 연구소를 여시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전 움직이는 연구소예요. 오늘도 KTX를 타고 오면서 일본 연수 계획 짜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니깐요”라고 하셨다. ‘움직이는 연구소’라는 말은 동섭쌤과 매우 잘 어울린다. 작년 겨울엔 살인적인 스케쥴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금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벌써 몇 년째 250배를 하다 보니, 감기도 걸리지 않고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라고 너스레를 떠신다.
▲ 독립연구자로 선 동섭쌤을 중심으로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 덕에 에듀니티 대표님도 이사님도, 윤진쌤도 함께 알게 되었다.
강의의 꽃은 뒷풀이(기승전‘뒷풀이’다)인데, 그때 만난 에듀니티 김병주 대표도, 윤진쌤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병주 대표는 “오히려 잘 됐습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더 넓은 곳에서 더 자유롭게 연구활동과 강의를 하셔야죠”라고 덧붙였으며 윤진쌤은 준비한 선물에 “독립연구자로 다시 태어나심을 축하드립니다. 교수님의 열정과 배움이 더 반짝이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늘 곁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걸음걸음 나아가시길 바랄께요. 응원합니다!! 파이팅”이라 썼다.
나도 그런 말들에 백퍼센트 동감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그대로 동섭쌤에겐 선순환이 되어 돌아올 거라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대에 제출하려 썼던 소명서에 “박동섭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면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많은 교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육 경력이 높아지는 만큼, 교육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기에 찾아와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그때 저와 비슷한 긍정적인 평가들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건 곧 박동섭 교수의 수업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는데, 신라대가 제 복을 발로 걷어찬 것이니 그 덕에 우리들은 불원천리하지 않고도 양질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더 넓은 세상에서 맘껏 활보하길 기대하며 응원한다.
▲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힘이 되고 기쁨이 된다. 동섭 형님의 독립연구자로의 발돋움. 그 첫 해를 축하하며~
후기를 끝낸 소감
막상 곁다리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인지, 실제로 다섯 편의 후기엔 강의 내용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글 전편에 흐르는 파토스pathos가 바로 동섭쌤에게 배웠던 것들이고 이번 강의에서 들었던 것이기에,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제주도 강의에서 우치다 타츠루쌤은 자아를 목조건물에 비유하며 설명했는데, 이에 동섭쌤은 “강연하시면서 레비나스의 ‘레’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내는 스승의 모습에 또 감탄.”이라 평가했는데, 이걸 그대로 패러디하여 이날 강연을 시작할 때 “비고츠키안이 되어, 비고츠키의 ‘비’자도 꺼내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그 말을 그대로 본 따서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의 내용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강의 내용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이만 강의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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