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혁신학교와 도그마
글이란 쓰면 쓸수록 처음의 생각과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글로 표현되기 전엔 머릿속에 사념으로 남아 있다. 그게 실재한 것인지 망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활자로 전환하는 과정 속에 간섭효과가 생기며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무겁지 않게 쓰려 노력했고 그게 첫 번째 글에선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후기는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지리한 글이 되었다. 맘처럼 안 되는 게 인생만 있는 건 아니다. 글 또한 내 맘과는 자꾸 다르게 써진다.
세 편의 후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 강의가 지향하는 바, 또는 동섭쌤의 특징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보도록 하자.
▲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얘길 해줬다. "일이 먼저 있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일이 성립됩니다."
‘학교를 혁신하자’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
우리나라에 서양 이론이 들어오거나, 영향력 있는 나라의 사상이 들어오면 도그마dogma가 되는 경향이 있다. ‘열린교육’이란 단어가 수입되어 학교 담장을 모두 허무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협동학습’이란 단어가 수입되어 대부분의 수업에 모둠학습이 적용되었으며,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며 수행평가가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색다른 수업 모델을 수업에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은 좋지만, 수입된 이후엔 ‘그것만이 좋은 것’이라 강요하며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모두 그걸 적용해야만 했다.
2014년 교육감 선거로 대거 ‘진보교육감’이 뽑히면서 학교에는 혁신의 물결이 파도를 쳤다. 그 당시 대안교육계에선 우스갯소리로 “이러다 대안학교(준규쌤식 표현 야매학교-왠지 이 단어가 더 끌린다)가 다 망하는 거 아녜요?”라고 했었다. 그 말마따나 각 교육청별로 ‘혁신학교’라는 것을 운영하며 좀 더 학생친화적이며, 각자의 꿈을 살리는 교육의 장이 마련되었다.
▲ 14년과 18년 교육감 선거.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됐다.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지 기대된다.
하지만 선사고에 다닌 한 학생은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데, 선생님들은 그 하나의 목표에 따라 준비해주려 하더라구요. 혁신학교라는데 일반학교와 똑같아요”라고 말했다. 물론 이 한 학교의 사례만으로 모든 혁신학교를 똑같다고 일반화하는 건 아니다. 단지 ‘혁신’이란 단어를 외치는 순간 ‘혁신’은 사라지고, ‘학교를 혁신하자’고 외치는 순간 그건 다른 무수한 논의를 죽이는 폭력적인 말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에 동섭쌤은 “일본의 아키타秋田엔 혁신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선 ‘혁신’이란 말을 쓰지 않아요. 그곳 교사들은 모두 그런 식의 교육을 누구나 하기에 다르게 정의할 말이 필요 없었던 거죠. 더욱이 그곳에선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마을 할머니들이 집 앞까지 나와서 ‘잘 갔다 와’라고 인사해주는 게 일상입니다”라고 말한다.
단어를 통해 하나로 규정지어버리면, 다른 무수한 논의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오로지 그것만이 절대 선인 양 모양새를 취하고 권좌의 자리에 앉기에, 그 외의 것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재능은 그 일을 단박에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 떄까지 계속하는 데 있다.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줄 아는 데 있다. 종국에는 그 일마저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데 있다. -카페 헤세이티
옳은 것조차도 절대권력이 되면 절대 부패한다
동섭쌤은 아키타의 얘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이게 꽤나 충격적인 예화였는데, 그 당시엔 왠지 웃겼다. 그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혁신’이란 말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쓰이며(닳고 닳은 혁신), 얼마나 권력화되었는지 보여주는 예화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섭쌤이 전주 신흥고(모교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니 은근 반갑다)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을 때, 담당자가 주제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라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고 또박또박 제목을 알려줬단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러 다시 전화가 와서 강의 제목을 확인하는데, 그때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대화가 오고 간 것일까? 담당자는 강의 제목을 “지금 왜 칭송받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칭송받는 교사가 학교에 필요하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고, 학교를 혁신하자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며, 교권이 붕괴되어선 안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당연하기에 더 이상 어떤 상상도, 의문도, 비판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전혀 반대되는 제목을 말했음에도, 그 당연함에 기인하여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만 것이다. 동섭쌤은 “언어꾸러미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하나의 논리만이 ‘옳다’며 모든 것을 집어 삼켜서는 안 되며, 다양한 가치와 생각이 공존하여 길항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도 교육현장에 필요하다고 말한 거예요.”라고 정리했다.
▲ 혁신학교에 전면에 떠오르며, '혁신'은 닳고 닳아버렸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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