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2. 합리적 귀신론
명당과 우리가 모시는 제사
유교에서 죽은 후에 혼백이 흩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묘자리 쓰는 진정한 이유는 혼백이 잘 흩어지는 자리를 고르는 것입니다. 명당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속성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흩어질 적에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흩어지지 못하고 갑자기 탁 흩어지게 되면, 이 혼이 어디서 괴이하게 뭉치거나 잘못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동양인들은 죽는 순간에 사람의 혼백이 탁 하고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형태로 혼이 있으면 그 형태로 어느 정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고 난 바로 다음은 혼이 명료하게 있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흩어지는 겁니다. 그 흩어지는 기간 동안에 제사를 지내는데, 한 세대(generation)를 30년으로 보고 4대를 통해서 한 120년간 제사를 지내는 거죠. 이것은 흩어지는 유예기간을 설정한 것으로서 이 4대 봉사의 기간에 그 사람은 살아있는 훼밀리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래서 뒤뜰 사당에 모시죠. 4대가 지나면 매주(埋主)라고 해서 신주를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죠. 이런 합리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주자는 혼의 영속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급사예요. 주자는 불교가 말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중에서 “지(地)ㆍ수(水)는 유형적 세계이며 땅이고, 화(火)ㆍ풍(風)이라는 것은 무형적 세계이며 하늘이다”라고 해서 지(地)·수(水)·화(火)·풍(風)은 땅과 하늘로 나누어 백(魄)이고 혼(魂)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지(地)·수(水)가 점점 고갈되어 가고 화(火)·풍(風)도 같이 희미해져 가다가 덜컥 끝나면 죽는 것인데, 이렇게 잘 죽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급사(急死), 원사(寃死)의 경우입니다.
급사의 경우, 만약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 하면, 혼은 흩어질 준비기간이 없는데 갑자기 백(魄)의 기능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혼은 갑자기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이 없어졌으므로 황당한 거지요. ‘야, 아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내 백(魄)이 어디로 갔냐?’ 이러면 혼(魂)이 억울하겠죠. 이런 경우에 혼(魂)이 원귀가 된다, 이런 이야깁니다. 제대로 흩어지지 못하는 거죠. 옛날 사람들이 대개 교통사고를 당하면 당한 그 자리에서 굿을 합니다. 실지로 이런 굿을 할 필요가 있어요. 거기서 풀어줘야지 그렇지 못하면 원귀가 계속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원귀에게 “미안하게 되었는데, 예고 없이 백이 없어지게 되어서 죄송하다”하고 무당이 대신 굿을 해서 혼이 잘 흩어지도록 “이제 백(魄)을 회복할 수 없으니, 혼이여! 미안하지만 하늘로 흩어져라”하고 잘 달래는 제사를 지내는 거지요. 그렇지 않으면 혼이 계속 원귀가 되어 자꾸 인간을 괴롭힌다는 겁니다. 이게 주자가 생각하는 굉장한 귀신론적인 틀이예요. 이 사람이 새로 만든 합리적인 틀이거든요. 이것이 유교에 어떤 틀을 줬어요. 합리론과 귀신의 초자연성 같은 것을 짬뽕을 했지요.
원불교 사은설(四恩說, 天地恩·同胞恩·父母恩·法律恩)의 천지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원불교인들도 그 불교의 윤회설 같은 걸 취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원불교 이론 같은 것을 보면, 불교의 윤회설을 그대로 취하고 있어요. 여기 원불교 분들도 와 계시지만, 나는 그런 해석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자의 합리론적 해설에 원불교가 받아들일 측면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불교의 사은설이 갖는 천지론적 성격과 일관되게 해설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겁니다.
정약용이 생각했던 귀신
그런데 이 정약용이란 사람의 전체적인 사상구조를 봅시다. 오구라 씨가 한국사상을 공부하니까 언제 한 번 이런 걸 발표해도 좋지요. 귀신론의 문제는 동서가 똑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근세로 오면서 정약용이 상제(上帝)를 말하게 됩니다. 그가 상제를 말하는 이유를 보면, “인간세의 도덕적 기준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고, 인간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주어질 때 인간은 더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초월신의 개념과 비슷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정약용의 사상이 그러니까 정약용도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정약용이 귀신을 상제라는 초월적 존재로 해석하려는 것은 상당한 근대정신의 표출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인간의 궁극적 도덕성의 근거로서 ‘요청하는’ 느낌이 강하지요. 칸트는 도덕적 원리(moral principle)로서 요청된 신(神)만 있을 뿐이고, 신이란 다만 요청될 뿐이라고 보는데, 사실 정약용의 이 상제론을 보면 칸트의 도덕론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인간세상에 있어서 귀신론이 문제되는 것은 귀신이라는 것을 어떠한 초월적 존재성으로 보느냐 내재적인 법칙으로 보느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양문명에서든 서양문명에서든 마찬가지로 이렇게 봤다가 저렇게 봤다가 한 문제이거든요. 나는 예전에, 서양은 초월적이고 동양은 합리적이라고 봤는데 그건 틀린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서양 사람들도 갓(God)이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한 것이 동양 사람과 별반 다를게 없고 이런 문제의식은 동서문명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귀신론에 있어서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차원, 즉 유교문명이 생각하는 차원은 역사라는 차원을 하나 더 갖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없는 거지요. 내 책 『새춘향전』에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오는데, 영화통사에 대한 글의 앞부분에 쓴 것 같은 데 한번 찾아보세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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