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에 잔치를 열었던 기록
하야연기(夏夜讌記)
박지원(朴趾源)
二十二日, 與麯翁步至湛軒, 風舞夜至. 湛軒爲瑟, 風舞琴而和之, 麯翁不冠而歌.
夜深, 流雲四綴, 暑氣乍退, 絃聲益淸. 左右靜黙, 如丹家之內觀臟神, 定僧之頓悟前生. 夫自反而直, 三軍必往. 麯翁當其歌時, 解衣磅礴, 旁若無人者.
梅宕嘗見簷間, 老蛛布網, 喜而謂余曰: “妙哉! 有時遲疑, 若其思也; 有時揮霍, 若有得也; 如蒔麥之踵, 如按琴之指.” 今湛軒與風舞相和也, 吾得老蛛之解矣.
去年夏, 余嘗至湛軒, 湛軒方與師延論琴. 時天欲雨, 東方天際, 雲色如墨, 一雷則可以龍矣. 旣而長雷去天, 湛軒謂延曰: “此屬何聲?” 遂援琴而諧之. 余遂作「天雷操」. 『燕巖集』 卷之三
해석
二十二日, 與麯翁步至湛軒, 風舞夜至.
22일에 국옹【국옹(麯翁)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홍대용(洪大容)의 벗으로, 성(姓)은 이씨(李氏)이며 시와 글씨에 빼어났다고 한다. 《湛軒書 內集 卷3 次友人韻却寄李麯翁》 국옹은 혹시 이한진(李漢鎭 : 1732~1815. 호 경산〈京山〉)의 일호(一號)일지 모른다. 이한진은 명필로서 전서(篆書)를 특히 잘 썼을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으며, 퉁소의 명수로서 홍대용, 김억(金檍) 등과 즐겨 합주(合奏)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기도 했다】과 함께 걸어서 담헌 홍대용【담헌(湛軒) : 홍대용의 당호이다. 담헌의 집은 서울 남산 기슭 영희전(永禧殿) 북쪽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정원에서 악회(樂會)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에게 갔고 풍무 김억【풍무(風舞) : 김억(金檍, 1746~?)의 호이다. 본관은 청양(靑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종택(金宗澤)의 아들이다. 177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하였다】이 밤에 도착했다.
湛軒爲瑟, 風舞琴而和之, 麯翁不冠而歌.
담헌이 거문고를 켜자 풍무는 가야금으로 화답했고 국옹은 갓을 벗은 채 노래 불렀다.
夜深, 流雲四綴, 暑氣乍退,
밤이 깊어 흐르던 구름이 사면에서 그쳤고 더운 기운이 잠깐만에 가시더니【流雲四綴 暑氣乍退: 『종북소선』에는 ‘暑氣乍退 流雲四綴’로 되어 있다】
絃聲益淸.
가야금 소리【현성(絃聲): 『종북소선』에는 ‘양현(兩絃)’으로 되어 있다】는 더욱 청명해졌다.
左右靜黙, 如丹家之內觀臟神,
좌우에 침묵이 흐르니 마치 내단 수련하는 이【단가(丹家)는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연단술은 기공(氣功)으로 정신을 수련하는 내단(內丹)과 약물을 복용하는 외단(外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단에서 오장(五臟)에 깃든 신(神)을 관조하는 수련법을 내관이라 한다】의 내관장신 같았고,
定僧之頓悟前生.
입정한 스님이 전생을 갑자기 깨친 것 같았다.
대체로 스스로 돌아봐 꼿꼿하다면 삼군이 있더라도 반드시 나갈 기세였다【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勇氣)에 관해 논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거기에서 증자(曾子)는 공자로부터 대용(大勇)에 관해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비록 수천 수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여기서 ‘축(縮)’ 자는 ‘직(直)’ 자와 뜻이 같다】.
麯翁當其歌時, 解衣磅礴,
국옹이 노래를 부를 때엔 옷을 풀어헤치고【방박(磅礴): 『종북소선』에는 ‘반박(盤礡)’으로 되어 있다. 서로 같은 말로, 무례하게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을 뜻한다】
旁若無人者.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했었다.
梅宕嘗見簷間, 老蛛布網,
매탕 이덕무【매탕(梅宕): 이덕무(李德懋)의 일호(一號)이다. 『종북소선』에는 ‘형암(炯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덕무의 일호이다】는 일찍이 처마 사이의 노련한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고
喜而謂余曰: “妙哉!
기뻐하며 나에게 말했다. “오묘하구나!
有時遲疑, 若其思也;
때때로 느리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여 생각이 있는 듯하고
有時揮霍, 若有得也;
이따금 진두지휘하고 재빠르기도 하여 얻음이 있는 듯하니
보리를 모종하는 발꿈치 같고 거문고를 안은 손 같네【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이덕무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관찰하고서 한 말과 같다】.”
今湛軒與風舞相和也, 吾得老蛛之解矣.
이제 담헌과 풍무가 서로 화답하고 있으니 나는 노련한 거미의 풀이를 얻었다.
去年夏, 余嘗至湛軒,
작년 여름에 나는 일찍이 담헌에게 가니
湛軒方與師延論琴.
담헌은 곧 악사 연익성(延益成)【『담헌서(潭軒書)』 내집(內集) 권4에 「연익성에 대한 제문[祭延益成文]」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연익성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가로서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5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홍대용과는 30년 동안 교유하였다고 한다】과 함께 거문고를 논의하고 있었다.
時天欲雨, 東方天際,
때에 비가 오려 해서 동쪽 하늘가
雲色如墨,
구름빛은 먹물 같아
一雷則可以龍矣【가이용의(可以龍矣):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可以龍□矣’이든 ‘可以□龍矣’이든 글자가 누락된 듯하기에 문맥을 감안하여 의역하였다】.
한 번 번개가 치면 용이 되게 할 만했다.
旣而長雷去天,
이윽고 긴 번개가 하늘에서 치니
湛軒謂延曰: “此屬何聲?”
담헌은 연익성에게 “이 소리는 어떤 음에 속하는가?”라고 말했다.
遂援琴而諧之.
마침내 거문고를 가져와 연주했다.
余遂作「天雷操」. 『燕巖集』 卷之三
나는 마침내 「천뢰조(天雷操)」【조(操)는 금곡(琴曲)에 붙이는 명칭이다. 여기서는 ‘천뢰조’라는 금곡의 가사(歌辭)를 지었다는 뜻이다. 『종북소선』에는 이 구절이 ‘終未得云’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였으나, 끝내 조율하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해야 된다】를 지었다.
인용
3.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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