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日暮途遠)
시간은 촉박한데 할 일은 많다
伍子胥者, 楚人也, 名員. 員父曰伍奢, 員兄曰伍尙, 其先曰伍擧, 以直諫事楚莊王, 有顯, 故其後世有名於楚.
始伍員與申包胥爲交, 員之亡也, 謂包胥曰: “我必覆楚.” 包胥曰: “我必存之.”
及吳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旣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屍, 鞭之三百, 然後已.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 “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 伍子胥曰: “爲我謝申包胥曰: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於是申包胥走秦告急, 求救於秦. 秦不許. 包胥立於秦廷, 晝夜哭, 七日七夜不絶其聲. 秦哀公憐之曰: “楚雖無道, 有臣若是, 可無存乎!” 乃遣車五百乘救楚擊吳.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보필하여 패자로 만든 오자서(伍子胥)의 집안은 원래 6대에 걸쳐 초(楚)나라에 충성을 바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다. 당시 평왕에게는 건(建)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평왕은 오사를 태자 건의 태부(太傅)로, 비무기(費無忌)를 소부(少傅)로 임명했는데, 비무기는 태자 건에게 불성실했다. 얼마 후, 평왕은 태자비를 진(秦)나라에서 맞아 오기 위해 비무기를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공주가 미인인 것을 본 비무기는 말을 달려 돌아와 평왕에게 진나라의 공주를 태자에게 주지 말고 직접 취하라고 건의했다. 평왕은 진나라 공주를 가로챘으며, 그녀를 더없이 사랑하여 아들 진(軫)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비를 맞게 해 주었다. 이 공로로 비무기는 평왕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평왕의 사후가 걱정이었다. 태자가 왕이 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므로 겁이 난 나머지 태자 건을 중상하기 시작했다. 평왕은 차츰 태자 건을 멀리하더니 마침내는 변경인 성보(城父) 태수로 임명하여 국경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계속해서 왕에게 태자를 “태자는 진나라 공주의 일로 분명히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태자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태자는 성보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때가 되면 제후들과 교제를 맺고 수도로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참소했다. 평왕은 비무기의 참소에 넘어가 즉시 태자의 태부인 오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추궁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왕에게 참소한 것을 알았으므로 “왕께서는 어찌하여 참소로써 사람을 해치려는 소인배의 말을 믿으시고 친자식을 멀리하려 하십니까?”라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태자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비무기는 필사적으로 나와 “왕께서 지금 당장 이를 막지 못해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결국 포로가 되실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평왕은 즉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군정관(軍政官))인 분양(奮揚)에게 태자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분양은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태자에게 사람을 미리 보내 도망치라고 알려 줬다. 태자 건은 송(宋)나라로 도망했다.
태자를 내쫓은 비무기는 다음 차례로 오사 일가를 지목하며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현명합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비를 인질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옥중의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물론 불러들이면 오사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조건이었다. 오사가 거절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다.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자 작은아들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후환이 될까 두려워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우리 둘을 불러들이려는 것입니다. 가는 날이면 부자가 함께 죽고 말 뿐 조금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면 아버지의 원수마저 갚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 힘을 빌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만 못합니다.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말렸다.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위해 자진해서 옥에 갇혔다. 오자서는 도망쳐 송나라에 있는 태자 건에게로 갔다. 오상이 수도로 호송되자 평왕은 오사와 오상 부자를 함께 처형해 버렸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 직후에 송나라에서는 때마침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鄭)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극진히 예우해주었으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태자 건은 진(晉)나라로 떠났다. 태자 건이 정나라와 친한 사이로, 정나라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진경공(晉頃公)은 그를 이용해 정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태자 건을 꼬드겼다. 진경공은 태자 건이 안에서 내응하고 진나라가 밖에서 공격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키면, 그곳에 태자 건을 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태자는 욕심을 품고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종자가 정나라 조정에 이 음모를 고발해 버렸다. 그 종자는 어떤 일로 태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자신이 살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주살하고 말았다.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허둥지둥 오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국경 지대에 이르러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쫓겼으므로 할 수 없이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했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오자서는 가까스로 강수(江水)에 이르러서 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자서는 강을 건너자마자 차고 있던 일백 금의 값어치가 나가는 칼을 끌러 어부에게 사례했다. 어부는 “초나라에 이런 방이 붙었소. 오자서를 잡는 사람에게는 속(粟) 5만 섬과 집각(執珏, 초나라 최고의 작위)의 벼슬을 준다고 말이오. 만일 내게 욕심이 있었다면 그런 일백 금의 칼이 문제겠소?”라고 말하며 칼을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들어섰으나 도성으로 가는 도중 병에 시달리고, 걸식을 하는 등 심한 고생을 겪었다. 오자서는 장군인 공자 광(光)을 통해 오왕 요(僚)를 알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고을이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양쪽 여자들이 뽕 때문에 시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두 고을이 서로 공격을 했고, 이것이 양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오나라는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치게 했다. 공자 광은 국경 지대 일부 고을을 함락시킨 다음 돌아왔다. 오자서는 오왕 요에게 이 기회에 공자 광을 보내 초나라를 계속 공격하라고 건의했다. 공자 광은 오자서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와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이런 공자 광의 반응을 보고 오자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공자 광은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금은 외부의 문제를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자서는 전저(專諸)라는 자객을 공자 광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5년 후 초평왕이 죽었다. 그리고 앞서 태자비가 될 뻔했다가 평왕의 비가 된 진나라 공주의 아들 진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昭王)이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두 공자(요의 아우 개여(蓋餘)와 촉용(燭庸))를 시켜 초나라를 기습 공격하게 했지만, 두 공자는 오히려 퇴로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오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여 국내가 텅 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은 자객 전저를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합려이다. 합려는 즉시 오자서를 불러들여 행인(行人, 외교 고문)에 임명하고 함께 국사를 꾀했다. 이럴 즈음 초나라의 대신 백주리(伯州犁) 부자가 주살되고, 그의 손자인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해 왔다. 합려는 그를 대부에 임명했다. 한편, 앞서 초나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퇴로를 차단당하고 곤경에 처하게 된 두 공자는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에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초나라는 그들을 서(舒) 땅에 봉했다.
오왕 합려는 즉위 3년 후에 군사를 일으켜 오자서, 백비 등과 함께 초나라를 쳐서 서를 함락시키고, 초나라에 투항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았다. 합려와 오자서는 이번 기회에 초나라의 수도 영초까지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 있어 아직 때가 아니므로 좀 더 기다리자는 손무(孫武)의 의견에 따라 군사를 물리고 돌아왔다.
합려 6년(BC510), 이번에는 초나라의 군대가 오나라를 침공했다. 합려는 오자서에게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오자서는 초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초나라의 거소(居巢, 안휘성 소호시(巢湖市) 동북)를 점령했다.
합려 9년(BC507), 오자서에게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합려가 오자서, 손무 등과 상의를 통해 대대적으로 초를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합려는 먼저 초나라의 속국이면서도 초나라와 원한 관계가 깊은 당(唐), 채(蔡)와 연합하고, 국내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오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다. 소왕은 수도 영을 탈출하여 도망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잡으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300번이나 매질을 한 후에야 그쳤다. 산중으로 피난 갔던 초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그대의 복수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이 결정을 내리면 사람을 깨뜨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옛날에는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면하여 그를 섬겼는데 이제 죽은 사람을 욕보였으니 어찌 천도가 없는 것의 극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고 오자서는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라. 해는 지고 길은 멀기 때문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라고 말했다. -출처: 고사성어 대사전
겉뜻: 날이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속뜻: 시간은 얼마 없는데 할 일은 많다는 뜻이다.
유의어: 일모도궁(日暮途窮)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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