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曰:“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는 백설처럼 희어 향기가 나네[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라는 시구 같은 것이니, 이는 곱고 아름답고 정교하여 거의 머물러 생각했거나 애써 괴로이 구한 것이 아닐 것이다.
詩率意立成者, 如李太白‘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 婉麗精巧, 略無留思苦求者.
보한집은 다만 본조 고려의 시만을 싣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를 말함에 있어서 두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학을 말하면서 공자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이 글의 끝에 간략하게 언급했다.
무릇 시를 다듬고 연마함에 있어서 두보와 같이 한다면, 묘하기는 묘할 것이다. 그러나 솜씨가 서투른 자가 시를 다듬고자 하여 수고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졸렬하고 난삽하게 되며 그것이 더욱 심하면 헛되이 애만 태울 따름이다. 그러니 어찌 각자 자신의 재주에 따라 천연스럽게 뱉어내어 갈고 줄질한 흔적이 없는 것과 같으리오?
『補閑』, 只載本朝詩, 然言詩不及杜, 如言儒不及夫子, 故編末略及之.
凡詩琢鍊如工部, 妙則妙矣, 彼手生者, 欲琢彌苦, 而拙澀愈甚, 虛雕肝賢而已; 豈若各隨才局, 吐出天然, 無礱錯之痕?”
첫 번째 인용문인 권중 20에서는 소식의 신의(新意)와 이백의 재빠른 작시솜씨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의(新意)는 송시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그 의미는 고인(古人)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不襲古人語] 새로운 뜻을 지어내는 것[創出新意]으로 작시자(作詩者)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새로운 의경(意境)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소식의 특징이지 송시의 특징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백이 시를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짓는 솜씨에 대하여는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도 일찍이 “이백(李白)은 천재(天才)로 호매(豪邁)하여 시어가 대부분 재빠르게 이루어진 것이다[太白天才豪邁, 語多卒然而成者.].”라고 평하였는데, 최자 또한 염동수(閻東叟, 고려 문인, 미상)의 말을 인용하여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인용문인 권중 34에서는 『보한집』의 한계는 고려조의 시만을 실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권하 12에서는 학시(學詩)의 문제를 제기하여 두보의 조탁미가 뛰어나긴 하지만 서투른 솜씨로 배우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자신의 재주와 역량에 따라 쓴 시가 더 좋다고 하였다. 최자는 고려중ㆍ후기 사람으로 『보한집』은 고종 41년 1254년에 완성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려시인을 평가할 때 중국시인 및 시작과 서로 비교하였다. 고려후기는 송시를 추존한 시기로 최자 또한 존송파이므로 그 입장에서 학시(學詩)의 문제(問題)를 제기하고 무조건 두보를 배우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