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갑자기 닥쳐온 환란으로 집안이 쑥대밭이 됐지만 그걸 운명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이 불러들인 실존의 문제로 여겼다. 바로 이런 가치관이 여유당이란 호를 짓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니, 의심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 비방이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여유당에 스민 다산의 마음
바로 다음의 문장에서 그는 드디어 ‘여유당’이란 당호를 짓게 된 경위를 말한다.
노자의 말에 “신중하도다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것처럼, 경계하도다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이라고 하였으니, 이 두 말이야말로 나의 병을 고칠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반적으로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사람은 한기가 뼈에 아리듯하기에 심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몸에 이를까 걱정하기에 비록 심히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余觀老子之言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嗟乎之二語, 非所以藥吾病乎.
夫冬涉川者, 寒螫切骨, 非甚不得已, 弗爲也; 畏四鄰者, 候察逼身, 雖甚不得已, 弗爲也. -丁若鏞, 「與猶堂記」
우선 이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산이 노자를 읽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걸 인용까지 해놨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실제로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후금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고 난 후에 실질도 없는 북벌론北伐論(오랑캐인 청을 치자)을 외쳐댔고, 중원에서 사라진 중화사상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소아병적인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져 들었다. 그때부터 성리학은 교조화되어 주자의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되며 터부시되었고 『노자』와 『장자』와 같은 것들은 아예 읽어서도 안 되었다.
이런 흐름은 정조에게까지 이어져, 중국에서 넘어온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지금으로 치자면 수필이나, 여행기 같이 일상의 일들을 담은 글)을 써서는 안 되었으며, 정통적인 방식의 철리哲理를 고문체로 담아야 한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애꿎은 희생양이 연암의 『열하일기』였는데, 그걸 함께 읽어보던 무리에서조차 불로 태우려 했으며, 정조는 연암을 불러 열하일기를 쓴 죄를 씻기 위해 반성문을 빼곡히 적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산은 노자를 읽었고 그걸 인용까지 한 것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 문체에 따라 군자의 풍모가 정해진다고 믿던 시절, 연암의 글은 천박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장이었다.
실제로 위의 글은 『노자』 15장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15장은 도를 행하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테면 “머뭇거리도다. 마치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 / 살피는도다.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 엄숙하도다. 마치 손님인 듯 / 풀어지도다. 마치 얼음이 풀리듯(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라는 식이다. 보통은 어떤 것들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묘사하게 마련인데, 이 글에선 직접적인 묘사는 불가능하다고 전제를 한 후에, 이와 같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산은 도를 행하는 사람의 경지를 표현한 이 글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할지어다’라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정조란 방어막이 사라진 후에 얼마나 주변에 신경을 썼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 '조심하자'라는 당호를 지었지만, 채 1년도 못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마재에서 맛본 인생의 아이러니
복원된 생가는 원래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다만, 뒤편 언덕에 다산과 숙부인의 묘지가 합장되어 있어서 여기가 다산의 생가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니, 그곳에 이르러서야 찐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광경을 보면서 하피첩霞帔帖으로 과시했던 끈끈한 부부애의 완결판을 보는 듯했다.
다산의 시호는 문신으로서 최고의 시호인 ‘문도공文度公’이다. 이 시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을 땐 천주교를 한때 믿었다는 이유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죽은 후에야 최고의 시호를 받은 것이니 말이다. 그마저도 다행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후에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생존의 모욕과 멸시를 어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마재에서 만난 다산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렇기에 ‘잘 나간다고 방자하지 말고, 못 나간다고 서러워 마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산의 서글픈 삶과는 반대로 한껏 친해진 우리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다음 장소인 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 아내가 시집 올 때 입은 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오자, 다산은 아들과 딸에게 글을 써서 다시 보내줬는데, 이게 하피첩으로 남아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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