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6/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2007년 실학캠프 참가기 - 2. 다산과 일두와 연암(07.07.03.화)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7년 실학캠프 참가기 - 2. 다산과 일두와 연암(07.07.03.화)

건방진방랑자 2025. 5. 6. 12:03
728x90
반응형

2. 다산과 일두와 연암

마재수원화성일두고택안의초등학교

(07.07.03.)

 

 

나에게 여행이란 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 계획되어 있기에 가는 것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 의해서 여행을 떠난 적은 있었어도, 내가 원해서 떠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내일만 보고 살아가는 놈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보다,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나에게 여행이란 이런 광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모르기에 떠나는 여행

 

그렇게 살아왔기에 나의 의지로 참가하기로 결심을 한, 실학순례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쯤 되어서 드는 생각은 왜 여태껏 내 의지대로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맘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히 했을 뿐, ‘진짜로 떠나보자는 결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의 문정아 할머니가 남편이 했던 이탈리아, 로마를 출발해 전 세계를 돌고, 다시 이탈리아 시칠리로 돌아오는 둘만의 세계일주를 하자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약속을 희망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방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언젠가 삶이 나아지면 떠날 수 있겠지하는 생각만 할 뿐, 지금 당장 실현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끊임없이 이런 여행 프로를 보며 "기다려라 시칠리~ 곧 내가 간다"고 주문을 건다.

 

 

그러고 보면 미래의 어느 때를 기약하는 삶은 늘 현실을 도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 당장 할 수도 있는 일임에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미루거나 무관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이번처럼 우연한 기회를 만나 처음으로 의지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라 할 수 있을 터다.

 

더욱이 다산연구소가 뭐하는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여행을 가는 것인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행을 떠난다. 지금까진 알던 사람들과 아는 곳으로 떠난 것이 고작이었는데,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곳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모르는 상황을 맞이하는 게 두려워서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모르는 건 예측할 수 없기에 수많은 공포를 만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낯선 세계와 마주쳐 어떤 울림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과거엔 두려움에 방점을 찍고 복지부동했다면, 이젠 설렘에 방점을 찍고 과감하게 도전하게 된 것이다. 과연 실학순례를 하며 어떤 사람들과 마주치며, 어떤 역사들과 마주했을까?

 

 

▲  이렇게 거국적인(?) 행사인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석했다. 

 

 

 

아기가 처음 만난 세계를 느끼다

 

8시까지 강남 터미널 입구에서 모이기로 했다. 전주에서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여행 첫날부터 그런 식으로 바쁘게 움직이기는 싫어서 그 전날에 올라와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자기 때문인지, 여행에서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며 찜질방 천장(에반게리온의 낯선 천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더라. 그렇게 비몽사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을 맞이했고 찜질방을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엄마 뱃속에서 나와 세상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너무 오래 전 일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태아는 현실과 꿈을 구분할 수 있을 만한 지적 능력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느낌을 이 순간 생각으로나마 간접 체험을 해보면, 아마도 지금의 내 마음과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열하일기(熱河日記)호곡장(好哭場이란 글에서 어둑컴컴한 뱃속에서만 있던 아기가 넓디넓은 세상을 마주하면 그 광활하고 확 트인 느낌에 감격하여 울어버린다고 표현하며, 자신이 광활한 요동벌판을 보면서 느낀 감흥이야말로 아이의 첫울음과 같다고 풀어냈다.

 

그처럼 나 또한 찜질방에서 나와 햇살이 비쳐오는 세상과 마주했을 때, ‘힘차게 울어재낄 만하다는 감정이 절로 일어났다. 세상의 모든 게 나를 향해 임박해오는 느낌, 그리고 그런 세상을 거부감 없이 맘껏 받아들이며 한껏 어우러질 수 있는 흥겨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설렘이었다. 왠지 그 순간 이번 여행은 싱그러울 것만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거짓말 살짝 보태서, 이 때의 느낌은 강한 햇빛이 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어색하기에 금방 친해질 수 있다

 

강남 터미널 입구에 가보니,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처럼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매우 어색한 분위기 속에 쭈뼛쭈뼛 서있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상황은 전혀 달랐다. 서로 잘 아는지 아는 체를 하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그렇게 서로 아는 체를 했고, 몇몇은 나처럼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제 여행은 시작 단계이니 빨리 친해지자는 조급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34일 간의 일정을 함께 하다보면, 언제 그렇게 어색했나 싶게 친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다산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로 향한다. 마재는 다산이 자란 곳이자, 다산의 묘지까지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다산을 기리는 장소로, 다산의 사상을 음미할 수 있는 장소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전주에 사는 내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찌 남양주에 와볼 수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의미보다 우리에겐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을 뿐이다. 아무리 지금은 어색할 수밖에 없으니, 괜찮다며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려 해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아마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나와 같이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감내하며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마재에 버스가 도착하여 내리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어색한 만큼 더 금방 친해진다는 말이 정말로 와닿는다. 나만 어색하게 느낀 게 아니라,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색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인사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근데 신기한 점은 매우 어색한 만큼, 금방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통성명을 하며 이름만 알고 ~ 잘 알겠습니다라고 끝나지만, 이땐 긴 여행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함께 나눈 인사는 곧 우리 지금부터 함께 다닙시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인사를 나눈 사람들과는 첫날 일정 내내 함께 다니게 됐다.

 

나는 이때 두 명의 동생들과 인사를 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광주에서 올라온 문수라는 동생과 서울교대에 다니며 투철한 교육자적 신념을 지닌 진철이란 동생이 바로 그들이다.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사람들 속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생기니 언제 그렇게 어색했냐 싶게 우린 형, 동생이란 호칭을 자연스럽게 붙이며 함께 다닐 수 있었다.

 

 

▲  처음에 통성명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친해져서 함께 다니게 된, 문수와 진철이.

 

 

 

마재에서 느낀 다산의 향기

 

마재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형제가 나서 자란 곳이다. 마재는 남한강의 굽이치는 절경 속에 우뚝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형상으로 특이한 모습이다 보니, ‘이곳이야말로 비범한 인물이 나올만한 장소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이런 해석은 다산이 이미 유명한 사람이기에 결과에 껴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런 곳에 살다보면 대자연을 그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며 깊은 심성에 자리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와 같은 환경이 어린 다산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래서 애절양(哀絶陽)’과 같은 가슴 절절한 문장을 구사하게 만들게 했으리라.

 

이제 실학순례는 첫 걸음을 떼었다. 어색하던 사람들과 금방 친해진 것만큼이나 마재에서 느껴지는 다산의 자취에도 절로 눈길이 갔다. 이곳은 다산의 형제들이 자란 곳이자, 다산이 말년에 삶을 정리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관료로서 잘 나가던 생활을 정리하고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이곳에 와서 여유당이란 당호를 짓게 되는데, 그 당호에 담긴 가슴 절절한 이야기는 30대 후반 다산의 기구한 삶을 재구성하기에 충분하다.

 

 

▲  실학순례의 첫 여행지인 마재에서 다산의 향기를 느껴볼 차례다.

 

 

 

마재엔 다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담겨 있다

 

마재에 도착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통성명을 하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 그러니 멋쩍을지라도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친해지니 말이다. 그 덕에 나도 두 명의 친구가 한 순간에 생겼고 어색한 사람들과 어떻게 34일 동안 지내지라는 우려는 말끔히 사라졌다.

 

마재는 다산이 나서 15년 동안 자란 곳이자, 12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1년간 머물다가 유배 후에 돌아와 18년을 살았던 곳이다. 마재에서만 34년을 산 것이니, 다산의 시작과 끝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생애는 180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도 이전의 생애는 탕평책으로 정조의 비호를 받으며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던 때이다. 정조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수원화성은 다산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수원화성을 만들 때 사용한 거중기(擧重機)를 다산이 고안하여 발명한 것으로 성곽축조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했으며, 정조가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겸하여 화성행궁에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만들어 그 장엄한 광경이 한강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실제로 다산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마당에 기념탑과 함께 거중기가 떡하니 있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공직자 다산의 대표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핍박이 닥쳐온다. 남인들은 탕평책으로 혜택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고졸 취업 늘어나라는 기사의 제목처럼 극소수의 남인이 대우받았을 뿐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차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벽파의 심기를 매우 많이 거슬려서 언제고 제거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인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자인 정조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기에 태풍 전야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원화성은 노론의 심기를 무척이나 건드렸다. 지금으로보면 수도 이전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러던 1800년에 정조는 의문의 죽음정조의 죽음에 대해선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둥, 홧병에 의한 것이라는 둥 다양한 얘기들이 있지만, 지금의 세월호 사건에도 수많은 의문들이 따르듯 그 당시에도 백성들은 그 죽음에 수많은 의문들을 덧붙였다을 당하게 되자, 노론은 절호의 기회라도 잡은 듯 남인들의 약점인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마침내 피의 복수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감행한다.

 

 

 정조는 천주교는 사교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봐서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조 때부터 박해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여파로 남인세력은 완전히 쑥대밭이 됐고,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만다. 조선 최초의 자발적 천주교 영세자이자,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1756~1801)과 셋째 형인 정약종(17601801)은 마지막까지 배교를 하지 않아 사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흑산도의 수산물을 기록한 책이 있음과 막내인 다산은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배교를 했기에 사형이 아닌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한참 잘 나가던 관료에서, 이젠 비빌 언덕조차 없는 역적으로 인생은 한 순간에 뒤바뀌었다. 이쯤 되면 영화 타짜에서 나도 인생의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본 사람이야라는 고니의 말이 다산의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때 다산은 그런 울분을 다방면의 서적을 편찬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풀어낸다.

 

 

   ▲  다산은 근엄하다. 그가 좀 더 친근한 어조로 말한다면, 아마도 고니처럼 감정 팍팍 담아서 표현하지 않았을까.

 

 

 

여유당, 그기 뭐꼬?

 

1800년에 공직생활을 끝내고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는다. 정조가 승하하면서 대대적인 남인 핍박이 펼쳐질 것을 걱정하며 그런 심정을 당호에 담은 것이다. 이 당호야말로 그 당시 다산이 얼마나 심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앞날에 닥칠 우환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그런 당호를 짓게 된 경위는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적혀 있으니, 지금부턴 그 내용을 살펴보며 그때의 심정을 유추해보도록 하자.

 

 

어려서부터 세상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의심할 줄을 몰랐고, 커서는 과거공부에만 빠져 돌아볼 줄을 몰랐으며, 30살이 되어서는 지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여 싫어하지 않았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도 받았다. ! 이것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나의 성품에 따른 것이니, 내가 또한 어찌 감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是故方幼眇時, 嘗馳騖方外而不疑也; 旣壯, 陷於科擧而不顧也; 旣立, 深陳旣往之悔而不懼也.

是故樂善無厭而負謗獨多. 嗟呼! 其亦命也. 有性焉, 余又何敢言命哉. -丁若鏞, 與猶堂記

 

 

 여유당에 걸려 있는 편액. 과연 이 당호는 어떻게 지어진 걸까?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지금까지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놓쳤던 것들을 떠올리며 일생의 일 막을 정리하고 있었던가 보다. 계속될 것만 같던 관료 생활이 끝나고 폭풍의 전야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자신이 놓쳐온 것들의심치 않음[不疑], 되돌아보지 않음[不顧], 두려워하지 않음[不懼]을 돌아봤고, 그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 박노해 시인이 말한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건너 뛴 삶)’이라는 시처럼, 과거의 질곡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아픔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운명이라기보다, 성품 때문이라고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그건 선천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기보다, 자기 성향에 따른 문제이기에 삶의 태도가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우린 운명론자가 아닌 실존의 철학자인 다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다산은 마재에서 나고 자랐으며, 죽었다.

 

 

 

여유당에 스민 다산의 마음

 

정약용은 갑자기 닥쳐온 환란으로 집안이 쑥대밭이 됐지만 그걸 운명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이 불러들인 실존의 문제로 여겼다. 바로 이런 가치관이 여유당이란 호를 짓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니, 의심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 비방이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바로 다음의 문장에서 그는 드디어 여유당이란 당호를 짓게 된 경위를 말한다.

 

 

노자의 말에 신중하도다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것처럼, 경계하도다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이라고 하였으니, 이 두 말이야말로 나의 병을 고칠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반적으로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사람은 한기가 뼈에 아리듯하기에 심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몸에 이를까 걱정하기에 비록 심히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余觀老子之言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嗟乎之二語, 非所以藥吾病乎.

夫冬涉川者, 寒螫切骨, 非甚不得已, 弗爲也; 畏四鄰者, 候察逼身, 雖甚不得已, 弗爲也. -丁若鏞, 與猶堂記

 

 

우선 이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산이 노자를 읽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걸 인용까지 해놨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실제로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후금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고 난 후에 실질도 없는 북벌론(北伐論, 오랑캐인 청을 치자)을 외쳐댔고, 중원에서 사라진 중화사상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소아병적인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성리학은 교조화되어 주자의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되며 터부시되었고 노자장자와 같은 것들은 아예 읽어서도 안 되었다.

 

이런 흐름은 정조에게까지 이어져, 중국에서 넘어온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지금으로 치자면 수필이나, 여행기 같이 일상의 일들을 담은 글을 써서는 안 되었으며, 정통적인 방식의 철리(哲理)를 고문체(古文體)로 담아야 한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애꿎은 희생양이 연암의 열하일기였는데, 그걸 함께 읽어보던 무리에서조차 불로 태우려 했으며, 정조는 연암을 불러 열하일기를 쓴 죄를 씻기 위해 반성문을 빼곡히 적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산은 노자를 읽었고 그걸 인용까지 한 것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문체에 따라 군자의 풍모가 정해진다고 믿던 시절, 연암의 글은 천박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장이었다.

 

 

실제로 위의 글은 노자15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15은 도를 행하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테면 머뭇거리도다. 마치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 / 살피는도다.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 엄숙하도다. 마치 손님인 듯 / 풀어지도다. 마치 얼음이 풀리듯[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라는 식이다. 보통은 어떤 것들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묘사하게 마련인데, 이 글에선 직접적인 묘사는 불가능하다고 전제를 한 후에, 이와 같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산은 도를 행하는 사람의 경지를 표현한 이 글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할지어다라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정조란 방어막이 사라진 후에 얼마나 주변을 신경 썼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조심하자'라는 당호를 지었지만, 채 1년도 못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마재에서 맛본 인생의 아이러니

 

복원된 생가는 원래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다만, 뒤편 언덕에 다산과 숙부인의 묘지가 합장되어 있어서 여기가 다산의 생가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니, 그곳에 이르러서야 찐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광경을 보면서 하피첩(霞帔帖)으로 과시했던 끈끈한 부부애의 완결판을 보는 듯했다.

 

다산의 시호는 문신으로서 최고의 시호인 문도공(文度公)’이다. 이 시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을 땐 천주교를 한때 믿었다는 이유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죽은 후에야 최고의 시호를 받은 것이니 말이다. 그마저도 다행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후에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생존의 모욕과 멸시를 어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마재에서 만난 다산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렇기에 잘 나간다고 방자하지 말고, 못 나간다고 서러워 마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산의 서글픈 삶과는 반대로 한껏 친해진 우리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다음 장소인 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아내가 시집 올 때 입은 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오자, 다산은 아들과 딸에게 글을 써서 다시 보내줬는데, 이게 하피첩으로 남아있다.

 

 

 

화성행궁에서 여는 발대식

 

일정이 좀 늦어져서 1120분이 되어서야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이미 무예24기의 무술 시범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동수가 정조의 명으로 편찬했다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무예들을 시범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철갑을 입고서 날렵한 동작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 참 경이로웠다.

 

그 시범식이 끝나자마자, 발대식을 했다. 다 같이 모여 파이팅을 수도 없이 외치며 카메라 세례를 받으니, 꼭 유명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발대식이 끝나고 바로 그 근처에 있는 화성별궁으로 이동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들어서서 먹게 된 점심은 불고기백반이다. 34일의 여행 동안 먹을거리는 늘 풍성했다. 혹 실학기행이 아닌 먹방기행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성대한 발대식이라니, 재밌긴 하네. 

 

 

 

일두란 호가 지닌 의미

 

3시간여를 달려 경남 함양에 도착했다. 사림파 계보의 한 획을 그은 정여창의 고택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호는 대단히 이색적이다. 보통 자신의 거주지나 추구하는 인생관을 호에 담기 마련이어서 호를 통해 그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자호는 일두(一蠹)이지 않은가. 바로 한 마리의 좀벌레라는 뜻이다. 왜 그런 자기비하에 가까운 호를 붙였는지, 설명을 듣자마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오래된 책에 좀벌레가 많기 때문에, 그런 학문적인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을 투영한 것이거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뜻을 담은 것이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작은 것의 소중함이지 않을까. 거창할 필욘, 특별할 필요도 없다. 수수함 속에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 호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난 실체의 화려함이 아니라, 유명무실이 되지 않으려는 내면과 외면의 조화일 테니까.

 

 

  일두 고택에선 느낀 건, 작은 것의 소중함이었다. 좀벌레를 바라는 삶을 닮고 싶더라.  

 

 

 

학문의 깊이는 인품의 넉넉함으로 드러난다

 

이와 맞물려 한 지식인이 지역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행사하는지 볼 수 있었다. 일두 선생도 그렇지만 자산 정약전 같은 경우는 흑산도에서 이어도로 다산을 마중하러 나가려 하자 주민들이 말리는 통에 한 밤 중에 몰래 도망치듯 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지역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로서의 몫을 하다 보니, 그 지식인을 통해 그 지역이 발전되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한 사람의 영향이 이렇게 막대한데, 과연 요즘에도 이런 지식인이 있을까? 돈이 최고의 가치로 올라선 지금은 그런 내적 충만함보다 외적인 재화의 많음으로 모든 게 좌지우지 되는 것만 같아 씁쓸한 뿐이다.

 

 

한 지식인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제대로 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연암의 자취가 거의 사라진 자리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안의초등학교였다. 조선시대엔 여기에 안의 현청이 있었단다. 하지만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예전 관아건물을 허물고 초등학교를 세움으로 연암의 유적은 비석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어찌 조선 후기의 대표 문인인 연암을 이렇게 방치하고 홀대할 수 있단 말인가. 뭐 학문적인 업적의 논리를 떠나서 연암을 현재에서 재조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마음이 아팠다. 연암협에 가면 연암의 발자취를 볼 수 있을런지……

 

안의에서 연암은 그가 생각해온 정치적 이상을 맘껏 펼쳤다. 그런 정치에 감동 받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선정비를 세우려고 했다가 연암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런 연암의 면모를 그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過庭錄)에서만 볼 수 있을 뿐, 이곳에선 더 이상 상고해볼 수 없다.

 

 

안의초등학교 남은 건 비석 하나밖에 없다. 연암의 자취는 사라져 있다는 게 맘 아프다. 

 

 

 

덕유산 휴양 수련원에서의 마무리

 

저녁엔 덕유산 휴양 수련원에 도착해서 자기소개를 하고 조별 모임을 하게 되었다. 우리 조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워낙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이 한 조가 되다 보니, 아무 거리낌 없이 맘껏 친해질 수 있었다. 방 배정 때엔 나이순으로 하게 되어 전혀 공통점은 없지만 금세 맘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별 모임을 했고 방원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이렇게 3박 4일간 어우러지게 된다. 

 

 

인용

사진 / 여행기 / 지도

1. 돌아다니는 멍청이

2. 마재수원화성일두고택안의초등학교

3. 강진사의재다산초당백련사

4. 대흥사보길도발표회

5. 반계유적지곰소 젖갈수원화성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