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통하였느냐
강진→사의재→다산초당→백련사
(07.07.04.수)
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우산을 펴고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김영호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아침밥임에도 6찬일 정도로 푸짐했다.
사의재에서 느낀 다산의 울분
강진으로 향하는 길, 우린 버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었지만 6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었기에 꽤 힘들었다.
우리가 강진 사의재(四宜齋)에 도착한 시간은 1시 26분이다. 복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사의재는 다산이 유배를 당하고 최초로 머물렀던 곳이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은 유배자를 멀리하는 풍속 때문에 다산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는데, 주막 노파만이 유일하게 받아주었다고 한다.
‘생각은 담백하게, 모습은 장엄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思宜澹 , 貌宜莊, 言宜訒, 動宜重]’라는 사의재의 이름은 다산이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워낙 주변 광경이 좋다 보니 다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꼭 신혼여행을 온 관광객처럼 말이다.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에서 인간 다산이 느꼈을 굴욕감과 낭패감, 그리고 울분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어리더라.

▲ 사의재에 서서. 다산이 네 가지로 자신을 단속해야 했던 그 무거움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다산에게서 배운 스승학
그곳을 떠나 다산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렸을 때 와본 기억이 있다. 그땐 무언지도 모른 채 그냥 한 바퀴 돌아보고 갔었다.
지금 보는 다산초당의 느낌은 그때와 사뭇 달랐다. 지금은 유서 깊은 곳으로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는 곳으로 변모해 있었으니 말이다. 다산초당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지만, 나의 다산에 대한 관심이 변한 탓이다. 다산의 두 번째 유배지인 이곳은 500여권 저작의 기초작업이 이루어진 곳이며, 다산학이 발흥한 곳이다. 또한 제자 황상과의 ‘삼근(三勤)’이라는 문답이 오고간 곳이기도 하다.
배우는 자에겐 큰 병통 세 가지가 있지만 너는 이게 없단다. 첫째는 암송함에 민첩한 것이지만 그 폐단은 소홀한 것이고, 둘째는 글짓기에 날렵한 것이지만 그 폐단은 부왕부왕한 것이며, 셋째는 깨우침이 빠른 것이지만 그 폐단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노둔하지만 뚫는 사람은 구멍이 넓어지고 고지식하지만 소통하려는 사람은 흐름이 콸콸할 것이며, 엉뚱하지만 연마하려는 사람은 광채가 윤기나리라.
뚫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지런한 것이고 소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지런한 것이며, 연마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지런한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을 부지런하다고 하는가? 마음을 다잡고 확고히 하는 것이다.
學者有大病三, 汝無是也. 一敏於記誦, 其弊也忽; 二銳於述作, 其弊也浮; 三捷於悟解, 其弊也荒, 夫鈍而鑿之者, 其孔也濶; 滯而疏之者, 其流也沛; 戛而磨之者, 其光也澤.
曰鑿之奈何? 曰勤; 疏之奈何? 曰勤; 磨之奈何? 曰勤, 曰若之何其勤也? 曰秉心確.
다산 초당에 찾아온 젊지만 배움이 짧았던 황상은 “저에겐 병통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노둔하고 둘째는 고지식하며, 셋째는 엉뚱합니다.[我有病三, 一曰鈍, 二曰滯, 三曰戛.]”라고 자신의 한계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듯이 말을 한다. 배우려는 사람에게 위의 세 가지 한계점은 분명한 단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산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건 동전의 양면처럼 장점임을 드러냈다. 장점 속에 단점이, 단점 속에 장점이 있음을 이처럼 명징하게 말해주며 황상이 그 한계에 머물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어찌 보면 이 문장은 스승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으로 한 대상을 보고 판단 지으려 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무한대로 지닌 존재로서 인식하고 어떻게 가능성을 맘껏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것들엔 양면성이 늘 깃들어 있듯, 인간이란 존재도 그 양면성 중 어느 부분에 더 관심 갖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 사람들이 많으니 시끌벅적 휩쓸며 다닌다. 그래도 이틀을 봤다며 다들 금방 친해졌다.
다산에게서 배운 인생학
인생이 바닥으로 급전직하했음에도 그는 오히려 이때를 ‘참으로 독서할 만한 때’라고 정의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줄 아는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내가 시집올 때 입고 온 예복에 아이들을 권유하기 위한 글을 적기도 하며 가족에 대한 마음을 한시도 놓질 않았다. 마음이 무너진 자리, 가반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그는 한껏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래의 편지들이 이런 그 마음가짐을 잘 보여준다.
이제 너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 공부로 인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내 생각에는 네가 이미 진사도 되고 과거에 급제할 실력은 족히 된다고 본다. 글을 알면서도 과거 때문에 오는 제약을 벗어나는 것과 진사가 되고 급제한 사람이 되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 일인가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너야말로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난 것이다.
-「두 아들에게 부친다」, 1802년 12월 22일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쓰다
今汝旣不能赴科, 卽科文已忘憂矣. 吾意汝, 已爲進士矣, 已爲及第矣. 識字而無科擧之累, 與爲進士及第者, 奚擇焉? 汝眞得讀書時矣. -「寄二兒」, 壬戌十二月二十二日 康津謫中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이 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매화병제도>엔 6폭으로 기술)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적에 가져온 훈염(시집갈 때 입는 예복)으로서 붉은빛이 담황색으로 바래서 서본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 조그만 첩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전해준다. 다음 날에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곧 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다. 가경 경오년(1810년) 초가을에 다산(茶山)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余在康津謫中,病妻寄敝裙五幅,蓋其嫁時之纁衻,紅已浣而黃亦淡,政中書本。遂剪裁爲小帖,隨手作戒語,以遺二子,庶幾異日覽書興懷,挹二親之芳澤,不能不油然感發也。名之曰《霞帔帖》,是乃紅帬之轉▼(言+㥯)也。嘉慶庚午首秋,書于茶山東菴。-「題霞帔帖」
신유박해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나락에 떨어졌을 때, 다산은 이곳에 와서 심기일전할 수 있었다. 분명 주변 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스스로 긍정적 사고를 통해 제자들을 길러내고 책들을 저작하며 아들들을 격려하였을 뿐이다. 한때는 너무 외로워 처자를 그곳으로 부르려고도 했지만 가문의 반대로 성사시키진 못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그는 지극히 한 인간으로 외로움, 극도의 고립감, 죄책감 등을 수시로 느꼈지만 그 감정들을 그대로 표출하기보다 승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을 넘어서려는 자기의 의지이고 열정인 것이다. 난 다산을 볼 때마다, 특히 마재의 생활과는 현격하게 다른 강진의 생활을 볼 때마다 삶 그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얼마나 연약했는지, 얼마나 주위 여건을 탓하며 주눅 들어 있었는지를 말이다. 내 의식만 전복되면 바닥에 떨어진 그때가 다시 솟아오를 때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다산이 그랬듯이 말이다.

▲ 지금은 초당이 아닌 기와집이 됐지만 바로 이 자리에서 다산은 공부의 한을 맘껏 풀어냈다.
초당 뒷산과 백련사에서 느낀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일행은 뒷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산은 우이도(牛耳島)를 내려다보며 흑산도에 계신 형님을 생각했단다. 그런 지식 때문인지, 당연히 광활하게 바다가 펼쳐져 있고 섬이 두 개 보일거란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보니, 이건 바다라기보다 갯벌 같은 곳에 섬이 아닌 육지가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완전히 딴 세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백련사로 가는 길은 흡사 밀림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가는 길은 유쾌했다.
그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백련사이다. 작은 절이라 생각했으며 당연히 다산초당 근처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절에 계시던 혜장 스님이 자유롭게 다산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다산을 위해 음식까지 해줬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도 여지없이 깨졌다. 초당과 절까지의 거리도 상당했으며 절 또한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 학문이나 인품에 경도되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간다더니, 이 스님과 다산의 친분이 바로 그런 류의 것이었던 셈이다.

▲ 백련사에서 모두가 함께. 스님과 유학자의 우정처럼 각자 다른 우리들도 한껏 어울렸다.
팀별 장기자랑 준비와 민석의 귀환
이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우린 다산수련원에 도착했다. 어제 그 멤버 그대로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보니, 시설도 좋았고 방 또한 무지 컸다.
그곳에서 짐을 풀고 다산과 연암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곧 조끼리 모여 촌극 짜기에 들어갔다. 어제 ‘비슷한 것은 가짜다’로 주제가 정해져서 금방 끝나려니 했는데, 주제 자체가 너무 막연해서인지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그때 덕일이가 예전에 CF를 본떠서 촌극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우리의 논의는 급진전되어 ‘실학 장려 CF'를 하기로 결정했다.
방으로 돌아오니, 오늘 수업을 해야 한다며 서울에 갔던 민수가 정말로 돌아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힘든 여정을 강행하고 다시 돌아와 준 민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끈끈한 우정담은 왠지 다산과 혜장스님의 우정담을 방불케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째 날 밤도 추억 속으로 잠기어 가고 있었다.

▲ 운명공동체 3조 인원들과 함께.
인용
1. 돌아다니는 멍청이
4. 대흥사→보길도→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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