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에서 비를 피하며 느낀 게 있어서
도중피우 유감(途中避雨 有感)
이곡(李穀)
甲第當街蔭綠槐 高門應爲子孫開
年來易主無車馬 惟有行人避雨來 『稼亭先生文集』 卷之十六
해석
甲第當街蔭綠槐 갑제당가음록괴 | 큰 집【갑제(甲第): 너르고 큰 잘 지은 집, 두보(杜甫)의 「취시가(醉時歌)」에 “즐비한 저택에선 좋은 음식과 고기가 싫증나나 광문선생은 먹을 밥도 부족하다네[甲第紛紛厭粱肉 廣文先生飯不足].”라고 쓰여 있다】 그 당시 거리엔 푸른 회화나무 우거졌겠고 |
高門應爲子孫開 고문응위자손개 | 높은 문 응당 자손을 위해 문을 열었겠지. |
年來易主無車馬 년래역주무거마 | 근래에 주인이 바뀌어 거마가 끊겼고 |
惟有行人避雨來 유유행인피우래 | 오직 나그네만이 비 피하러 들어오네. 『稼亭先生文集』 卷之十六 |
해설
1ㆍ2구는, 우선 그 배경인 여러 고사를 알고서야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괴(槐)’는 홰나무 또는 회화나무로 불리는 낙엽 교목이다. 주대(周代)에는 대궐 외정에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삼공(三公)을 상징하였으니, ‘괴문(槐門)’ ‘괴정(槐庭)’ 등의 말도 이에서 유래됐다. 또, 송(宋)의 왕우(王祐)는 자손 중에 반드시 삼공이 나리라 예언하며, 뜰에 홰나무를 심어 가꾸더니, 후에 과연 아들이 재상에 올랐다는 고사 이래로, 자손의 영달을 기원하여 뜰에 홰나무 심는 풍습이 일게 됐다. 한편 ‘녹괴음(綠槐蔭)’의 ‘음(蔭)’은 ‘푸른 나뭇그늘’이란 뜻 외에, 하늘이나 조상이 은미(隱微)하게 감싸 도운다는 ‘음즐(陰騭)’의 뜻도 있다.
‘당가(當街)’는 요직(要職)에 있어 권력을 잡는다는 ‘당로(當路)’, ‘요로(要路)’의 뜻도 있어, 가로변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는 일차적 뜻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
‘고문(高門)’은 한(漢)의 우공(于公)이 여문(閭門)을 높게 중수하여, 그 자손이 높은 벼슬에 봉해지기를 기다렸는데, 후에 과연 아들이 승상(丞相)이 되고, 후(候)에 봉해졌다는 ‘고문대봉(高門待封)’의 고사에서, 자손의 출세를 기념(祈念)하여 대문을 높게 내는 소슬대문의 풍습도 전해지게 되었는 듯하다.
이렇듯, 복지(卜地)를 엄선한 지덕(地德) 높은 집터에, 자자손손의 부귀현달(富貴顯達)을 염원하여, 소슬대문 높이 내고 홰나무 심어 가꾼, 이 세가(勢家)의 호화 저택이, 이제는 주인도 바뀌어 들어, 회뢰청탁(賄賂請託)의 거마의 왕래로 붐비던 대문 앞은, 지금처럼 어찌다가 잠시 소나기를 피하여 들어서는 길손 외에는, 그저 언제나 적막하기만 하다.
자손 대대는 고사하고 당대에 이미 실각(失脚)한 것인가? 권불십년(權不十年)! 허망한 일장춘몽이던가?
전반과 후반의 너무나 큰 낙차(落差)가 권력무상(權力無常) 부귀초로(富貴草露)의 감개를 실감케 하고 있다.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130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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