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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 5. 도로 눈을 감아라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 5. 도로 눈을 감아라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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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도로 눈을 감아라

 

 

오늘날 한시에 대한 관심은 한갓 회고 취미나 골동품을 완상하는 호사는 아닌가? 더 이상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배출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시에 관한 담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문학과의 교과과정을 보면 현대시론이나 현대소설론, 현대비평론 등의 강좌는 있어도, 한국시론이나 한국소설론, 한국비평론 등의 강좌는 찾아볼 수 없다. 시론과 비평론은 꼭 현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전달한다. 독일문학비평사와 프랑스문학비평사, 중국문학비평사는 서점에 버젓이 꽂혀 있는데, 정작 볼만한 한국문학비평사는 한 권이 없다. 고작해야 그간 비평주제로 쓴 논문을 모아 엮은 것이 전부다. 문학사 강의는 언제나 고전문학사와 현대문학사가 따로 논다. 갑오경장이 없었다면 문학사는 어떻게 구분했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김옥균에게 감사하고픈 심정마저 든다.

 

우리에게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 있는 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과거의 시학은 오늘의 시학에 아무런 처방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그것은 해독되지 않는 파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겨를도 없다. 옛 것을 오늘에 호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야말로 정말 요긴한 것이 아닐까? 한유(韓愈)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의 정신을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기갈에 바짝 타는 목을 축이고 더위에 찌든 몸에 상쾌한 등목을 해줄 수 있다. 가야 할 미지의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짧은 두레박줄을 길게 늘이고,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도록 신발을 고쳐 신어야 할 것이다.

 

건축과 학생들이 가지고 다니는 자를 보면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한쪽은 인치가, 한쪽은 센티가, 나머지 한쪽엔 또 다른 길이 단위가 표시되어 있다. 목욕탕에 가서 온도계를 보면 화씨로 되어 있다. 그러니 온도계가 100도를 가리키든 120도를 가리키든 정확한 온도 관념이 생기질 않는다. 몸무게가 얼마나 되시지요? 120파운드입니다. 고속도로를 시속 200마일로 달려왔어. 이래서야 무게나 속도에 대한 관념이 바로 파악되지 않는다. 문예이론이나 미학체계의 전달에도 건축과 학생들의 삼각형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척으로 된 선인들의 이야기를 센티 자를 들이대어 재려고만 하니, 옛 사람들은 길이 관념이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게 된다. 눈금을 호환해 읽을 생각은 않고, 연구자들은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낸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번역이 나오면 그 다음 해에 이 방법을 원용한 한시 연구가 출간된다. 동양과 서양의 상상력 체계의 차이는 애초에 고려에 넣지 않는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54~ ) 소개되자 고전소설 연구자들까지 덩달아 욕망의 삼각형에 매달렸다.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 1913~1970) 때문에 문학사회학은 상종가를 달렸고, 또도로프(Tzvetan Todorov, 1939~2017)에 매달리고 바흐찐(Mikhail M. Bakhtin, 1895~1975)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언제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고, 우리는 따라가기만 바빴다. 그러는 사이에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이 나오고 데리다가 지나갔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우리가 숨가쁘게 쫓아 왔던 담론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얼떨결에 탈식민주의가 새삼스럽게 대두하고 동아시아 문화를 제대로 읽자는 목소리도 높아간다. 그렇지만 그런가?

 

그래서 이번에는 자척으로 설명하겠다고 나선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그 이야기는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 것인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애나 역사 배경을 주욱 늘어놓고, 거기에 작품을 꿰어 맞춰 일대기적 구성으로 재배열하거나, 자기가 연구하는 시인이 언제나 최고가 되는 당착은 고치기 힘든 병폐가 된 지 오래다.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가뜩이나 한문 해독의 부담을 지고 가는 터에 미학의 잣대마저 흔들리니, 이번에는 아예 인치를 가지고 자척을 재려 드는 격이 되고 만다.

 

 

이 책의 맨 처음연암(燕巖)으로 시작했으니, 이제 연암으로 끝맺겠다.

 

 

본분으로 돌아가라 함이 어찌 문장만이리요? 일체의 모든 일이 모두 그렇지요. 화담(花潭)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는가?” 대답하기를,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나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도달할 수 있었더랍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還他本分, 豈惟文章. 一切種種萬事摠然. 花潭出, 遇失家而泣於塗者曰: “爾奚泣?” 對曰: “我五歲而瞽, 今二十年矣. 朝日出往, 忽見天地萬物淸明, 喜而欲歸, 阡陌多歧, 門戶相同, 不辨我家, 是以泣耳.” 先生曰: “我誨若歸. 還閉汝眼, 卽便爾家.” 於是, 閉眼扣相, 信步卽到. 此無他. 色相顚倒, 悲喜爲用, 是爲妄想. 扣相信步, 乃爲吾輩守分之詮諦, 歸家之證印.

 

 

답창애(答蒼厓) 2이다. 20년 만에 눈이 열린 장님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기적 같이 열린 광명한 세상을 거부하란 말인가? 연암이 던지는 이 새로운 화두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을진대,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야말로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서구의 빛깔과 형상에 망상을 일으켜, 어느 골목이 바른 골목인지, 어느 집 대문이 제 집인지도 모르고 길가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아니 우리는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서 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눈뜬 장님은 아니었던가.

 

연암은 간명하게 일러준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나는 그의 이 말을 외래의 것을 버려 자신의 소아(小我) 속에 안주하라는 말로 듣지 않는다. 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 미분화된 원형질의 상태로 돌아가라. 눈에 현혹되지 말라. 네 튼튼한 발을, 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 일이다. 문학은 발전하는가. 다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인용

목차

1.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2. 거미가 줄을 치듯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4. 사기의 불사기사

5. 도로 눈을 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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