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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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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주역(周易)』 「계사(繫辭)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可久].”라 했다. 천지만물은 변화유동한다. 한 시대가 가면 또 한 시대가 온다. 이 도도한 변화 앞에 옛 것만 좋다고 우겨서야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 것이 옛 것과는 별개의 무엇인가? 그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확인함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오래 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이른바 통변(通變)’의 정신이 여기서 나온다.

 

유협(劉勰)문심조룡(文心雕龍)』 「통변(通變)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ㆍ부()ㆍ서()ㆍ기()는 이름과 실지가 서로 상응하니 여기에는 항상된 형식이 있다. 문사(文辭)와 기력(氣力)은 통하여 변해야만 오래 갈 수 있으니 이것은 일정한 방향이 없다. ()과 리()에는 항상됨이 있으니 형식은 반드시 옛 것에 힘입고, 통변(通變)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니 반드시 새 목소리를 참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끝없는 길을 내달릴 수 있고, 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 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두레박줄이 짧은 자는 목마를 수밖에 없고, 발이 지친 자는 가기를 멈추어야 한다. 문리(文理)가 다해서가 아니다. 통변(通變)의 꾀가 성글기 때문이다.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고, 형식적 틀이 있다. 새 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 것이 새 것 다우려면 옛 것을 변화시키는 통변(通變)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옛 것을 새 것이 되게 하는가? 어찌하면 드넓게 터진 길을 통쾌하게 내달릴 수 있을까? 마르지 않는 샘물에 목을 적실까? 그 길은 무방무체(無方無體) 하니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 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아무리 달고 찬 샘이라도 두레박줄이 짧아서야 마실 수가 없다. 의지를 확고히 다잡아도 물집 터진 발로는 먼 길을 갈 수 없다. 시인은 어떤 깊은 우물도 닿을 수 있는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다리를 가져야 한다.

 

 

옛 것으로 말미암아 지금을 보면 지금이 진실로 낮다. 그렇지만 옛 사람이 스스로를 볼 때 반드시 스스로 옛스럽다 여기진 않았을 터이고, 당시에 보던 자도 또한 지금 것으로 보았을 뿐이리라.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한다.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다. 천추만세는 지금부터가 옛날인 것이다.

由古視今, 今誠卑矣. 古人自視, 未必自古. 當時觀者, 亦一今耳. 故日月滔滔, 風謠屢變, 朝而飮酒者, 夕去其帷, 千秋萬世, 從此以古矣.

 

 

연암(燕巖) 영처고서(嬰處稿序)일절이다. 천추만세는 지금으로부터가 옛날이 된다. 무서운 말이 아닌가.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먼 후일의 옛날이 된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뒷날의 모범이 된다. 옛 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 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가고, 오늘의 주인공은 내일에는 무대 뒤로 사라져간다. ‘지금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사람은 가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의 정신이다. 어제가 오늘 되게 하고, 오늘이 내일 되게 하는 원형질이 여기에 담겨 있다.

 

연암은 또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씨(李氏)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 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 제가 글 지은 것이 겨우 몇 해이지만 남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습니다. 한 마디 말만 새롭고 한 글자만 이상해도 문득 옛날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하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며 어찌 감히 이 따위를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 하러 다시 합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요.”

내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며 말하였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창힐(蒼頡)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날을 모방했던가? 안연(顔淵)은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로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옛 것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창힐이 글자 만들 때를 생각하면서 안자(顔子)가 미처 펴지 못했던 뜻을 짓게 한다면 글이 비로소 바르게 될 것이다. 네 나이 아직 어리니, 남이 성냄을 당하거든 공경하며 사과하여 배움이 넓지 못해 미처 옛 것을 살피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거라. 그런대도 힐문하기를 그치지 않고 성냄을 풀지 않거든 조심스레 이렇게 대답하여라. ‘서경(書經)의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삼대(三代) 적의 당시 글이고, 이사(李斯)와 왕희지(王羲之)도 진() 나라와 진() 나라의 시속 글씨였습니다.’라고 말이다.”

李氏子洛瑞年十六, 從不佞學有年矣. 心靈夙開, 慧識如珠. 嘗携其綠天之稿, 質于不佞曰: “嗟乎! 余之爲文纔數歲矣, 其犯人之怒多矣. 片言稍新, 隻字涉奇, 則輒問古有是否?’ 否則怫然于色曰: ‘安敢乃爾?’ ! 於古有之, 我何更爲? 願夫子有以定之也.”

不佞攢手加額, 三拜以跪曰: “此言甚正, 可興絶學. 蒼頡造字, 倣於何古; 顔淵好學, 獨無著書. 苟使好古者, 思蒼頡造字之時, 著顔子未發之旨, 文始正矣. 吾子年少耳, 逢人之怒, 敬而謝之曰: ‘不能博學, 未攷於古矣.’ 問猶不止, 怒猶未解, 嘵嘵然答曰 殷誥周雅, 三代之時文; 丞相右軍, 晉之俗筆.’”

 

 

옛날에도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제가 또 합니까? 당돌한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세 번 절로 화답한다. 예전 창힐은 천지만물의 형상을 살펴 글자를 만들었다. 그가 글자를 만들자 밤에 천둥번개가 치고 귀신이 울었다고 옛 기록은 적고 있다. 천기(天機)가 누설됨을 슬퍼한 것이다. 시인의 정신은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자신의 노래로 귀신이 울게 해야 할 것이다. 제자 안연(顔淵)이 젊은 나이에 죽자 공자(孔子)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하며 아프게 울었다. 그러나 남은 글이 없으니 그의 상쾌한 정신은 만나볼 길이 없다. 내가 만약 그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또 그가 나였다면? 시인의 기상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창힐의 정신으로 안연의 마음을 담는다면 옛날과 지금의 경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때의 지금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글씨가 후대 서가(書家)의 승묵(繩墨)이 되듯, ‘오늘’ ‘여기서 부르는 내 노래는 뒷날 시가(詩家)의 보석이 된다.

 

 

 

 

인용

목차

1.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2. 거미가 줄을 치듯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4. 사기의 불사기사

5. 도로 눈을 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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