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공 속으로 난 길
1.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빛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언어와 언어가 만나 부딪치며 속삭이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취(生趣)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고정관념이 아닌 열린 가슴으로 세상을 대하라
조선 후기의 문호 연암 박지원의 「답창애(答蒼厓)」란 글에는 마을의 꼬마가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데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이를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꼬마가 대답하는 말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字)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천자문(千字文)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했다. 꼬마의 생각에는 암만해도 하늘이 검지 않고 푸른데, 책 첫머리부터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으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만 것이다.
저 까마귀를 보면, 깃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지만,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추면 자주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 하더니 비취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不覩, 而先定於其心.
연암이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한 말이다. 천자문이 푸른 하늘을 검다고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보았던가? 까마귀의 날개빛 속에 숨겨진 여러 가지 빛깔을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 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사물의 심장부를 찔러 들어가는 정신으로 시를 대하라
또 「답경지(答京之)」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쳐 말하기를,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飛去飛來之字]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相鳴相和之書]이로다’하였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말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朝起, 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叫曰: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釆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이른 아침 푸른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노니는 새들의 날개짓과 지저귀는 소리 속에서, 연암은 글자로 씌여지지 않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살아 숨 쉬는 ‘불자불서지문(不字不書之文)’을 읽고 있다. 푸득이는 새들의 날개짓이 주는 터질 듯한 생명력, 조잘대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주는 약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어떤 언어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일러 ‘생취(生趣)’ 또는 ‘생의(生意)’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靈動)하는 운치(韻致)인 것이다. 생취(生趣)나 생의(生意)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혀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빛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물상 속에 감춰진 비의(秘儀)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言]의 사원[寺]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詩)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美學)이다.
인용
3. 허공 속으로 난 길
5. 이명과 코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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