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문놀이터/인물지도 (125)
건빵이랑 놀자
신숙주申叔舟: 1417(태종17)~1475(성종6)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ㆍ희현당(希賢堂). 1.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았다고 함. 2. 세종 때 진사과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가 됨. 3. 『홍재전서』에선 “보한재와 같은 경우는 말도 잘했고 행동도 잘했다고 할 만하다. 널리 섭렵한 재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장을 지었고, 넓은 운용과 깊은 조처로 우리의 선왕들을 도와 다스림의 도구를 모두 다 펼쳤다.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넓고도 잡되지 않았으며, 분별하되 속이지 않아 일대의 문장이 환하게 갖춰졌다. 그러니 평생토록 쩔쩔매며 쓸데없는..
변계량卞季良: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1.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 2.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춘사春事유서幽棲등산제혜상인원登山題惠上人院근정전勤政殿제낙천정題樂天亭동년회우왕륜설연同年會于王輪設宴시위試闈감흥感興신흥유감晨興有感장부경도將赴京都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길재吉再: 1353(공민왕 2)~1419(세종 1)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1. 이색ㆍ정몽주ㆍ권근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불림. 2.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되자, 전에 모시던 왕을 위하여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지냈다. 3. 새로운 왕조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4. 『야은집(冶隱集)』 술지述志우음偶吟반궁우음泮宮偶吟여행촌이與杏村李후산가서後山家序 문학통사한국사 인용 안내도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자는 가원(可遠)ㆍ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1. 이색의 문하에서 배우며 과거에 급제했고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려 했지만 나이가 어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도전에게도 수학. 2. 고려 말을 대표하는 학자로 여러 벼슬을 맡았으며 1389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과격하게 국사를 논하다가 유배되어 지방을 전전하다가 1391년에 고향 양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을 쏟음. 3.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 즐거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白雪滿庭, 紅日照窓, 燠室溫堗, 圍屛擁爐, 手執一卷, 大臥其間, 美人纖手刺繡, 時復停針, 燒栗啖之, 此足樂也.”라고 말한 양촌의 말이 실려 있음. 4. 『양촌집(陽村集)』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
이첨李詹: 1345(충목왕 1)~1405(태종 5)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시호는 문안(文安)임. 1. 이색의 문인. 문과 급제 후 1375년 이인임과 지윤을 탄핵한 죄로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음. 2. 조선 건국 뒤에 기용되어 1400년 명(明)에 갔다 왔고 1403년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됨. 3.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있다. 영급암詠汲黯자적自適야과함벽루 문탄금성유작夜過涵碧樓 聞彈琴聲有作매천명 병서梅川銘 幷序용심慵甚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숭인李崇仁:1347(충목왕 3)~1392(태조 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1. 고려의 유신의 절개가 높이 평가되나, 뛰어난 시인이었음. 2 우왕 즉위년에는 친명파에 찍혀 대구현으로 유배됨. 1388년 최영 일파의 참소로 통주로 유배되었다가 정도전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피살됨. 3.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선 즐거움에 대해 말하며 “깊숙한 산방이나 고요한 집에서 밝은 창가의 편안한 책상에 향불을 피우고 스님과 담소를 나누며 차를 끓여서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즐길 만한 것이오[山房靜室, 明窓靜几, 焚香對僧, 煮茶聯句, 此足樂也].”라고 말했다. 4. 『도은집(陶隱集)』 과회음감표모過淮陰感漂母오호도嗚呼島득어전송 실기편제得於傳誦 失其篇題호종성남扈從城南제승사題..
정도전鄭道傳: 1342(충혜왕 3)~1398(태조 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1. 향리집안 출신 어머니는 노비의 피가 섞임. 원(元)의 사신이 명(明)을 칠 합동작전을 요청해오자 반대하다가 나주로 귀향감. 2. 4년 간 고향에서 머물렀으며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 밑에 학교를 열어 제자를 가르침. 3. 이성계와 관계 맺고 이성계의 추대로 성균관대사성이 된 후 조선 건국함. 4. 1397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고 이듬해인 1398년에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살해됨. 5.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는 즐거움에 대해 “북방에 눈이 처음으로 내릴 때 담비 가죽을 입힌 준마를 타고 누런 사냥개와 팔뚝엔 사냥매를 앉혀 거친..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6)~1392(공양왕 4)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1. 예문관은 문재가 뛰어난 사람들이 벼슬하던 곳으로 26살에 예문검열(藝文檢閱)로 벼슬을 시작함. 2. 1363년 무관직인 낭장이 되었고, 여진정벌을 하러 함경도 정주에 들렀을 때 중양절이었기에 시로 지었음. 3. 『포은집(圃隱集)』 춘春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홍무정사봉사일본작洪武丁巳奉使日本作등전주망경대登全州望景臺정부원征婦怨황도皇都봉래역蓬萊驛안변성루安邊城樓강남류江南柳강남곡江南曲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임 1328년 5월 9일 영해의 외가에서 출생, 이듬해 한산으로 귀향. 1333년 6세 부친 가정(稼亭)이 원의 제과(制科)에 급제. 1341년 14세 강화도 교동 화개산에서 독서. 가을 성균관시에 합격. 1343년 16세 5월, 별장(別將)에 보임됨. 성균관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 나감. 1344년 17세 7월, 「양진재기(養眞齋記)」 지음. 삼각산ㆍ감악산ㆍ청룡산 등지에서 독서. 동당(東堂)에 나가 과거에 응시. 1347년 20세 원의 벽옹(辟雍) 학영(學營)에 들어가 우문자정(宇文子貞)에게 주역을 배움. 1348년 21세 원의 학자감(學子監) 생원이 됨. 1350년 23세 가을, 원에서 귀향..
정포鄭誧: 1309(충선왕 1)~1345(충목왕 1) 자 중부(仲孚), 호 설곡(雪谷) 1.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촉망되던 젊은이로 원에 자주 다닐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음. 2. 그의 형제가 왕의 아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으로 울주로 유배됨. 3. 그곳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중원에서 벼슬할 뜻을 두고 1344년에 원에 갔으나 불행히 병으로 37세에 죽음. 계미중구癸未重九황산가黃山歌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시아示兒보제사종普濟寺鐘 한국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곡李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1. 이색의 아버지로, 백이정ㆍ정몽주ㆍ우탁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불림. 2.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유학을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이상을 이루기는 어려웠음. 3. 『가정집(稼亭集)』 도중피우道中避雨유감 / 부기중시사예有感 / 復寄仲始司藝세우효기細雨曉起칠월사일득가서七月四日得家書영사詠史청명후출성남망서산설淸明後出城南望西山雪숙금성현宿金城縣기완산최장원寄完山崔壯元기행일수 증청주참군紀行一首 贈淸州參軍제촌사題村舍기정대언寄鄭代言첩박명 용태백운妾薄命 用太白韻심보설深父說원수한原水旱석의釋疑창치금강도산사기刱置金剛都山寺記차마설借馬說시사설市肆說조포충효론趙苞忠孝論배갱설杯羹說소포기小圃記 문학통사한국한시사 ..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실재(實齋)ㆍ역옹(櫟翁) 1287년 검교정승 이진(李瑱)의 아들로 개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역옹(櫟翁) 1301년 15세 성균시에 장원, 이어 과거에 합격. 당시의 유력한 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부(權溥)의 사위가 됨. 1308년 22세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감. 1310년 24세 선부산랑(選部散郞)에 승진. 1312년 26세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악정(成均樂正)ㆍ농저창사(豊儲倉事)를 지냄. 1313년 27세 내부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에 오름. 1314년 28세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수학하..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복위 1) 자는 언명(彦明), 호는 졸옹(拙翁)ㆍ예산농은(猊山農隱). 1. 원나라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귀국하였다. 2. 벼슬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3.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높았으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4. 윗 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음. 5. 『동인지문(東人之文)』, 『졸고천백(拙藁千百)』 기유삼월치관후작己酉三月褫官後作(5言)기유삼월치관후작己酉三月褫官後作(7言)우하雨荷풍하風荷도현화인운到縣和人韻상원회호재 득루자上元會浩齋 得漏字현재설야縣齋雪夜송이임종직랑 귀구은送李林宗直郞 歸舊隱송봉사이중부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동인지문..
일연一然: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함. 조신전調信傳신충信忠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南白月二聖 努肹不得 怛怛朴朴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김현감호金現感虎삼국유사문학통사한국사 인용 안내도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 초명은 인저(仁低),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ㆍ지헌(止軒). 1168년 12월 16일 부친 이윤수(李允綏)와 모친 김씨의 아들로 출생.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 황려현(黃驪縣) 사람. 1171년 4세 부친이 성주(成州) 원(員)으로 부임하였으므로 임소로 따라감. 1174년 7세 부친이 내시(內侍)로 발령되어 다시 개성으로 돌아옴. 1178년 11세 숙부인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부(李富)가 부른 ‘지(紙)’자 운(韻)을 받아, 여러 낭관(郎官)들 ‘지로장행모학사 배심상재국선생(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이라고 지음 1181년 14세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최중(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진화陳澕: ?~? 본관은 여양(驪陽 : 지금의 홍성). 호는 매호(梅湖).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이다. 1. 무신란(武臣亂) 이후 새롭게 부상한 무반(武班) 출신의 신진사대부임. 2. 벼슬을 맡은 것들이 임금의 조서를 짓는 한림(翰林)ㆍ지제고(知制誥), 임금에게 충간(忠諫)을 하는 사간(司諫)ㆍ정언(正言)이었기에 문장을 잘 짓고 강직한 성품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음. 3.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에서 “이규보와 진화는 하나의 운으로 붓을 내달려 짓는다[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칭찬하고 있음. 4. 『매호유고(梅湖遺稿)』 춘만제산사春晩題山寺봉사입금奉使入金영곡사靈鵠寺춘일화김수재春日和金秀才야보野步도원가桃源歌류柳경도京都월계사만조月桂寺晚眺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극기金克己: ?~?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노봉(老峰). 1. 정중부의 난으로 산천에 은둔하다, 30대에 급제했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함. 2. 『삼한시귀감』엔 그가 지은 시가 이규보가 지은 시보다 더 많이 뽑힐 정도였음. 3. 그의 저서로는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고원역高原驛어옹漁翁통달역通達驛이화李花전가사시田家四時파천현우서派川縣偶書취시가醉時歌서정書情추만월야秋滿月夜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임춘林椿: ?~? 고려 중ㆍ후기의 학자.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1.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 부(父)인 광비(光庇)와 대부(大父)인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냄. 2. 무신란으로 12년 간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하다가 절친인 이인로의 합격에 힘입어 과거준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함. 3. 『서하집(西河集)』,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을 씀. 차우인운次友人韻서외원벽書外院壁사인견방謝人見訪기담지걸묵寄湛之乞墨서회書懷모춘문앵暮春聞鶯병중유감病中有感영몽詠夢기종형寄從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상이학사서上李學士書여미수논동파문서與眉叟論東坡文書화안기畫鴈記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인로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인.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한문학사 책이나 인터넷엔 이인로의 호가 쌍명재(雙明齋)로 나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쌍명재는 동시대인인 최당(崔讜)의 호로, 최당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즐겼다. 이인로도 여기에 참여하여 시를 지어 『쌍명재집(雙明齋集)』이 만들어졌고, 최당은 또한 『썅명재기(雙明齋記)』를 지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발(破閑集跋)」에서 잘 나와 있다】. 1. 조실부모하여 절에서 자라 승려가 되었다가 1180년에 문과에 급제함. 2. 죽림고회의 한 사람. 선명한 회화성(繪畫性)으로 탈속의 경지 보여줌. 문(文)은 한유를, 시..
김부식金富軾: 1075(문종 29)~1151(의종 5) 본관 경주. 자(字)는 립지(立之), 호(號)는 뇌천(雷川). 그의 4형제의 이름은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함. 1.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엔 김부식을 ‘살이 찌고 체구가 크며, 검은 얼굴에 눈이 튀어나옴’이라 표현함. 2. 1122년 보문각대제, 1124년 예부시랑 등에 오름. 3. 당시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이 지나친 예우를 받는다고 비판하며 이자겸과 권력 다툼을 벌임. 4. 1126년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타자 1135년 묘청 일파가 난을 일으켰고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정치적ㆍ문학적 라이벌인 정지상을 제거하며 서경세력을 진압함. 5. 퇴직한 후 8명의 젊은 관료를 보내주어 『삼..
정지상鄭知常: ?~1135(인종 13) 서경 출신. 초명은 정지원(鄭之元). 호는 남호(南湖). 미상 서경(西京)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정지원(鄭之元)이었음.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어머니 노씨(盧氏)에 의하여 양육되었음. 미상 청년기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고, 평양에 머물며 「대동강에서[送人]」와 같은 주옥 같은 시를 지었음. 1112년 3월에 진사과(進士科)에 을과(乙科) 장원으로 급제하였음. 이때 지은 시가 『백운소설』에 소개됨. 과거에 급제하기 10년 전부터 개경의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음. 1113년 3월에 왕을 알현하고 처음으로 벼슬을 받음. 1114년 4월에 담당자가 정지상이 장원급제한 자이므로 개경에서 벼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청을 올렸고 왕이 재가함. 1127년 3월에 좌정언(左正..
최유청崔惟淸: 1095(선종 10)~1174(명종 4)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재(直哉), 1. 그는 경사자집에 해박하였고,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2.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잡흥雜興행화杏花최유청전崔惟淸傳 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박인량朴寅亮: ?~1096(숙종 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고려 개국공신 수경(守卿)의 현손. 1. 문장이 아담하고 화려하단 평을 받으며 외교문서를 주로 담당함. 2. 1075년에는 요(遼) 황제에게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압록강을 지나와 경계 삼으려던 계획을 거두게 함. 3. 『고금록(古今錄)』, 『수이전(殊異傳)』 등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주중야음舟中夜吟송과사주귀산사宋過泗州龜山寺오자서묘伍子胥廟 수삽석납首揷石枏박인량전朴寅亮傳한국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최승우崔承祐: ?~? 1.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여 빈공과에 급제한 뒤 귀국.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ㆍ최언위(崔彦撝) 등과 함께 3최라고 불린다. 2. 그의 사육집(四六集) 5권을 저술하여 『호본집(餬本集)』이라고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최승우전崔承祐傳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경주최씨의 시조. 자(字)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 857년 경주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 부친은 견일(肩逸). 자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 868년 12세 당 유학 874년 18세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1년 빈공과 급제. 876년 20세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됨.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음. 877년 21세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終南山에 들어가 학업 연마. 879년 23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書記) 역할을 함. 그 후 4년 간 고병(高騈)을 대신하여 표(表), 장(狀), 서(書), 격문(檄文) 등을 지음 880년 24세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음.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