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楚亭集序 (8)
건빵이랑 놀자
8. 연암은 고문가일까?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은 나이가 스물 셋인데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며 나를 좇아 배운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그 글을 지음은 선진양한先秦兩漢의 글을 사모하였으나 그 자취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다 보니 간혹 근거 없는데서 잃고, 논의를 세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간혹 법도에 어긋남에 가까웠다. 이는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있어 서로서로를 헐뜯으면서도 함께 바름을 얻지 못하고 나란히 말세의 자질구레함으로 떨어져서, 도를 지키는데 보탬이 없이 한갖 풍속을 병들게 하고 교화를 손상시키는 데로 돌아간 것이니, 나는 이것을 염려한다. 새것을 만들어 교묘하기 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본받아 보잘 것 없는 것이 더 나으리라. 朴氏子齊雲,..
7. 해답은 법고와 창신의 조화로운 결합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 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 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각금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중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靈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예禮에는 송사訟事가 있고 악樂에는 의논이 있으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어진 이가 이를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가 이를 보면 지智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리더라도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선 성인..
6. ‘法古而知變’과 ‘刱新而能典’의 또 다른 예 그런 까닭에 배우지 않음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노남자魯男子의 홀로 지냄이고, 부뚜막 숫자를 늘이는 것을 부뚜막 숫자를 줄이는 것에서 본떠온 것은 우승경虞升卿의 변화를 앎이다.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减竈, 虞升卿之知變也. 이렇게 ‘법고이지변’과 ‘창신이능전’의 예를 하나씩 든 연암은 다시 노남자와 우승경의 이야기로 논지를 더 다진다. 옆집 노총각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이웃의 과부가 밤중 비에 제 집 담이 무너지자, 노총각의 집 문을 두드리며 하루 밤 재워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이 고지식한 청년은 예禮에 남녀는 60 이전에는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으니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과부는 현인 유하혜는 예전에 곤경에..
5.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한 예 물을 등지고 진을 치라는 것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자 회음후 한신은 말하기를, “이것이 병법에 있는데 생각건대 그대들이 살피지 않은 것일 뿐이다. 병법에 ‘죽을 땅에 놓인 뒤에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 배우지 않음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노남자魯男子의 홀로 지냄이고, 부뚜막 숫자를 늘이는 것을 부뚜막 숫자를 줄이는 것에서 본떠온 것은 우승경虞升卿의 변화를 앎이다. 背水置陣, 不見於法, 諸將之不服, 固也. 乃淮陰侯則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 兵法不曰: ‘置之死地而後生’乎?”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減竈, 虞升卿之知變也. 한신이 오합지졸들을 이끌고서 강한 조나라를 치러 갔을 때,..
4. 옛 것을 본받되 변할 줄 아는 예 옛 사람에 책읽기를 잘 한 사람이 있는데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 사람에 글을 잘 지은 이가 있으니 회음후 한신韓信이 그 사람이다. 왜 그럴까? 古之人, 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 有善爲文者, 淮陰侯是已. 何者? 공명선이 증자에게서 세 해를 배웠는데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이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선생님께서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것을 뵈었고, 선생님께서 손님 접대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선생님께서 조정에 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웠지만 아직 능히 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도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 公明宣學於曾子三年, 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宣見夫子之居庭, 見夫子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
3.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하라 아아! 옛것을 본받는다는 자는 자취에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 되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자는 법도에 맞지 않음이 근심이 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噫! 法古者病泥跡, 創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새것을 추구해서도 안 되고, 옛것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어떨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다소 심각해진 이 질문 앞에 연암은 비로소 처방을 슬며시 내놓는다. 그것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란 열 글자이다.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겉껍..
2. 새 것을 만든다는 건 기이한 걸 만드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창신은 괜찮은가? 세상에는 마침내 괴상하고 허탄하며 음란하고 치우치면서도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이는 석자의 나무가 관석關石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목소리를 청묘淸廟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니 창신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그렇다면 어찌 해야만 괜찮을까? 내 장차 어찌 할까? 그만 둘 수는 없는 걸까? 然則, 創新可乎? 世遂有怪誕淫僻 , 而不知懼者, 是三丈之木, 賢於關石; 而延年之聲, 可登淸廟矣. 創新寧可爲也. 夫然則如之何, 其可也? 吾將奈何! 無其已乎! 그래서 연암은 첫 단락의 결론을 ‘법고는 해서는 안 된다’로 못 박는다. 옛 것을 본받지 말아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옛것을 따르면 안 된다고 했으니, 새것을 ..
1. 본받는다는 건 흉내내기가 아니다 일전 석사논문을 지도했던 제자에게서 E-mail을 받았다. 고문론을 주제로 쓴 제 논문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연암을 고문가라고 한 논문 중의 언급 때문에 논란이 일었는데, 연암이 왜 고문가이냐? 그는 패관소품체를 썼다 해서 문체반정의 와중에서 정조에 의해 순정고문으로 된 반성문을 지어 제출하라는 견책을 입었다. 그렇다면 그는 반고문가임이 분명한데 무슨 근거로 고문가라고 했는가? 이것은 한양대학교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이 아닌가? 뭐 이런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요컨대 그런 상대의 계속된 힐난에 속수무책으로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물러선 녀석이 멀리 대만까지 글을 보내 내게 구조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연암은 고문가인가, 아닌가? 김택영이 『여한십가문초』에서 연암을 당당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