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회성원집발 (9)
건빵이랑 놀자
8. 한 명의 나를 알아주는 지기를 만난다면 앞서 세상을 떴다던 이덕무는 일찍이 한 사람의 지기, 단 한 사람의 ‘제2의 나’를 그려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7. 백아가 종자기를 잃고 나서의 심정처럼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가 석 자의 마른 거문고를 끌어안고 장차 누구를 향해 연주하며 장차 누구더러 들으라 했겠는가? 그 기세가 부득불 찼던 칼을 뽑아들고 단칼에 다섯줄을 끊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소리가 투두둑 하더니, 급기야 자르고, 끊고, 집어던지고, 부수고, 깨뜨리고, 짓밟고, 죄다 아궁이에 쓸어 넣어 단번에 그것을 불살라버린 후에야 겨우 성에 찼으리라. 그리고는 스스로 제 자신에게 물었을 테지. “너는 통쾌하냐?” “나는 통쾌하다.” “너는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 소리는 천지를 가득 메워 마치 금석金石이 울리는 것 같고, 눈물은 솟아나 앞섶에 뚝뚝 떨어져 옥구슬이 구르는 것만 같았겠지. 눈물을 떨구다가 눈을 들어 보면 텅 빈 산엔..
6. 지음을 잃고 보니 나는 천하의 궁한 백성이네 아아! 슬프다. 나는 일찍이 벗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아픔보다 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를 잃은 자는 오히려 두 번, 세 번 장가들어 아내의 성씨를 몇 가지로 하더라도 안 될 바가 없다. 이는 마치 옷이 터지고 찢어지면 깁거나 꿰매고, 그릇과 세간이 깨지거나 부서지면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혹 뒤에 얻은 아내가 앞서의 아내보다 나은 경우도 있고, 혹 나는 비록 늙었어도 저는 어려, 그 편안한 즐거움은 새 사람과 옛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없다. 嗚呼痛哉! 吾嘗論, 絶絃之悲, 甚於叩盆. 叩盆者, 猶得再娶三娶, 卜姓數四, 無所不可, 如衣裳之綻裂而補綴, 如器什之破缺而更換. 或後妻勝於前配, 或吾雖皤, 而彼則艾, 其宴爾之樂, 無間於新舊. 박제가가 사랑하던..
5. 친구들아 다들 잘 지내고 있니 「여인與人」, 즉 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에 나오는 성흠聖欽은 이희명李喜明(1749-?)의 자이고, 중존仲存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다. 백선伯善은 누구의 자인지 분명치 않다. 성위聖緯는 이희명李喜明의 형인 이희경李喜經(1745-?)이고, 재선在先은 박제가朴齊家(1750-1805), 무관懋官은 이덕무李德懋(1741-1793)를 말한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벗들이자 제자들이다. 한참 무더운 중에 그간 두루 편안하신가? 성흠聖欽은 근래 어찌 지내고 있는가? 늘 마음에 걸려 더욱 잊을 수가 없네. 중존仲存과는 이따금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겠지만, 백선伯善은 청파교靑坡橋를 떠나고 성위聖緯도 운니동雲泥洞에 없다 하니, ..
4. 진정한 벗 찾기의 어려움 봉규씨의 시詩는 훌륭하다. 그 대편大篇은 소호韶頀의 음악을 펴는 듯하고, 단장短章은 옥구슬이 쟁그랑 울리는 것만 같다. 그 음전하고 온아함은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드넓고도 소슬함은 마치 동정호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는 또 알지 못하겠구나. 이를 지은 자가 양자운인지, 아니면 이를 읽는 자가 양자운인지를. 아아! 말은 비록 달라도 글의 법도는 같으니, 다만 그 기뻐 웃고 슬퍼 우는 것은 번역하지 않고도 통한다. 왜 그런가? 정情이란 겉꾸미지 못하고, 소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장차 봉규씨와 더불어 한편으로 후세의 양자운을 기다림을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를 벗 삼는다는 말을 조문하련다. 封圭之詩盛矣哉. ..
3. 중국인의 문집을 읽고서 만나고 싶어지다 아아! 내가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심골心骨이 끓어올라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봉규씨封圭氏와 더불어 태어남이 이미 이 세상에 나란하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道도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홀로 서로 벗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실로 장차 벗 삼으려 할진대, 어찌 서로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땅이 서로 떨어짐이 만리라 한들 그 땅을 멀다 하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아, 슬프다! 이미 서로 봄을 얻을 수 없다면 진실로 벗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봉규씨의 신장이 몇 자나 되고 수염이나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다면 내가 같은 세상의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리오. 그렇다면 내가 장차..
2. 벗을 찾겠다고 하면서 후대를 기다리다 양자운揚子雲이 당시 세상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연히 천세千歲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어 말하기를, “내가 나의 『태현경太玄經』을 읽어, 눈으로 이를 보면 눈이 양자운이 되고, 귀를 기울이면 귀가 양자운이 되며,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것이 각각 하나의 양자운이거늘, 어찌 반드시 천세의 멂을 기다린단 말인가?”라 하였다. 揚子雲旣不得當世之知己, 則慨然欲俟千歲之子雲. 吾邦之趙寶汝嗤之曰: “吾讀吾玄, 而目視之, 目爲子雲, 耳聆之, 耳爲子雲, 手舞足蹈, 各一子雲, 何必待千歲之遠哉?”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곁에서 그 어려운 책을 누가 읽겠느냐고 퉁을 주자, ‘나는 천년 뒤의 양자운을 기다릴 뿐일세..
1. 벗을 찾겠다고 하면서 상우천고를 외치다 옛날에 벗을 말하는 자는 벗을 두고 혹 ‘제이오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글자를 만든 자가 ‘우羽’자에서 빌려와 ‘붕朋’자를 만들고, ‘수手’자와 ‘우又’자로 ‘우友’자를 만들었으니,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古之言朋友者, 或稱第二吾, 或稱周旋人. 是故造字者, 羽借爲朋, 手又爲友. 言若鳥之兩翼, 而人之有兩手也. 벗은 ‘제 2의 나’이다. 나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다. ‘붕朋’이란 글자는 ‘우羽’자의 모양을 본떴고, ‘우友’자는 ‘수手’자에 ‘우又’자를 포개 놓은 모양이다. 진정한 벗이란 새의 양 날개나, 사람의 두 손과 같이 어느 하나가 없어서..
79. 모두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쁠까 개인이 피폐해지면 공동체가 불안정해지며 결국 사회 전체가 붕괴된다. 이젠 밑도 끝도 모르는 지옥으로 치닫는 이와 같은 현실을 반성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되찾아야 한다. 적어도 50년 전만해도 ‘나만 잘 산다’는 말은 통용되지 않았고, 지금도 자본이 미처 이르지 못한 사회엔 그와 같은 사회 형태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인해질 때, 내가 살고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된다 아래에 나와 있는 예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유형무형의 삶들은 여전히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짐짓 ‘그런 마음은 불필요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게 아닐까.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