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지어진 정자와 정자의 이름
삼일정기(三一亭記)
김창협(金昌協)
정자의 모양과 이름이 이렇게 된 까닭
亭在谷雲之華陰洞, 吾伯父所置也.
何以名三一? 三柱而一極也. 何取於三柱一極? 以爲有三才一理之象焉爾.
曰: “是象之而爲也歟? 亦爲之而有是象也?” 始伯父杖屨於溪上, 有石焉如龜鼉之曝于涯, 其背可以亭也. 而前贏後殺, 劣容三柱, 因以成之而象具焉, 成而名之而義見焉, 是亦自然而已矣.
상으로 볼 것인가, 이치로 볼 것인가
凡物於天地間者, 其爲數至不齊也. 而莫不皆有自然之象焉. 知道者, 默而觀之, 無往而不相値焉, 顧昧者不察耳.
河之圖也, 洛之書也, 人但見其十與九而已矣, 而伏羲夏禹得之, 則天地生成之序, 陰陽奇耦之數, 一擧目而森如也. 故八卦作焉, 九疇敍焉, 至後之君子, 乃謂觀於賣兔者, 亦可以畫卦.
蓋善觀物者, 不以物觀物而以象觀物, 不以象觀象而以理觀象. 以象觀物, 則無物而非至象也; 以理觀象, 則無象而非至理也. 譬之, 庖丁眼中, 無復有全牛焉.
이 정자를 세움과 이름 지음은 의도는 없이 자연히 그리된 것이다
今是亭也, 其爲三與一者, 山之牧兒蕘叟, 皆可指而言之, 而其理象之妙, 則先生獨默契焉. 蓋朝夕俯仰其間, 有足玩以樂之, 而無俟乎圖書之陳於前矣. 然則是亭之作, 而先生之名之也, 惟無意於取義, 而邂逅相値, 爲可喜耳. 豈區區象之云乎?
抑嘗讀『易』「大傳」, 古之制器用者, 棟宇舟車, 以至弓矢杵臼, 所取象凡十有三卦. 嗚呼! 聖人之神智創物, 果有待於逐卦取象乎. 亦觀於其旣成而以爲有是象焉耳. 故仲尼著之而曰: “蓋取.” 蓋之爲言, 若然而不必然之辭也.
後有登是亭者, 觀於其法象, 苟亦曰: “蓋取乎.” 則可也; 如必曰: “象之而後爲.” 則非是亭之實也. 時癸酉季冬上旬, 從子昌協, 記. 『農巖集』 卷之二十四
해석
정자의 모양과 이름이 이렇게 된 까닭
亭在谷雲之華陰洞, 吾伯父所置也.
정자는 곡운의 화음동에 있으니 나의 백부 김수증(金壽增)께서 설치한 것이다.
何以名三一? 三柱而一極也.
어째서 삼일(三一)로 이름 지었는가? 세 기둥에 하나의 용마루로 되어서다.
何取於三柱一極?
어째서 세 기둥에 하나의 용마루를 취한 것인가?
以爲有三才一理之象焉爾.
세 개의 재주와 하나의 이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할 뿐이다.
曰: “是象之而爲也歟?
물었다. “그걸 형상화하여 지은 것인가?
亦爲之而有是象也?”
또한 그걸 지어놓으니 이런 형상이 있게 된 것인가?”
始伯父杖屨於溪上,
처음에 백부께서 시냇가에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걷다가
有石焉如龜鼉之曝于涯,
바위가 있는데 물가에서 거북과 악어가 볕을 쬐는 것 같아
其背可以亭也.
등에 정자를 세울 만하다고 여기셨다.
而前贏後殺, 劣容三柱,
앞은 넓지만 뒤는 좁아 협소하여 세 기둥만 용납하였기에
因以成之而象具焉,
정자를 지으니 모양이 갖춰졌고
成而名之而義見焉,
완성하고 이름을 지으니 뜻이 드러났던 것이니
是亦自然而已矣.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상으로 볼 것인가, 이치로 볼 것인가
凡物於天地間者, 其爲數至不齊也.
대체로 천지간의 사물은 수가 됨에 지극히 균등하지가 않지만
而莫不皆有自然之象焉.
모두 자연의 형상을 지니지 않음이 없다.
知道者, 默而觀之,
도를 아는 사람은 묵묵히 그걸 보면
無往而不相値焉, 顧昧者不察耳.
어딜 간들 서로 만나지 않음이 없지만 다만 어두운 사람은 살피지 못할 뿐이다.
河之圖也, 洛之書也,
하도와 낙서는
人但見其十與九而已矣,
사람이 다만 10과 9만을 볼 뿐이지만
而伏羲夏禹得之, 則天地生成之序,
복희씨와 하나라 우임금이 그걸 얻으면 천지 생성의 질서와
陰陽奇耦之數, 一擧目而森如也.
음양의 홀수와 짝수가 한 번에 들면 눈에 비치고 늘어서는 듯했던 것이다.
故八卦作焉, 九疇敍焉,
그러므로 8괘가 지어지고 구주【구주(九疇): 천제(天帝)가 우(禹) 임금에게 주어 천하를 다스리게 했다고 하는 아홉 가지의 대법(大法)으로, 바로 낙서(洛書)를 말한다.】가 차례대로 만들어져
至後之君子, 乃謂觀於賣兔者,
후대 군자에 이르러선 곧 ‘토끼를 파는 사람만 보고도
亦可以畫卦.
또한 괘를 그릴 수 있다’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蓋善觀物者, 不以物觀物而以象觀物,
대체로 잘 사물을 보는 사람은 사물로 사물을 보지 않고 형상으로 사물을 보며
不以象觀象而以理觀象.
형상으로 형상을 보지 않고 이치로 형상을 본다.
以象觀物, 則無物而非至象也;
형상으로 사물을 보면 사물마다 지극한 형상이 아님이 없고
以理觀象, 則無象而非至理也.
이치로 형상을 보면 형상마다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
譬之, 庖丁眼中, 無復有全牛焉.
비유하면 포정의 눈 속엔 다시 온전한 소가 없는 것 같은 것이다.
이 정자를 세움과 이름 지음은 의도는 없이 자연히 그리된 것이다
今是亭也, 其爲三與一者,
이 정자가 세 기둥과 하나의 용마루로 만들어진 것은
山之牧兒蕘叟, 皆可指而言之,
산의 목동이나 나무꾼이 모두 가리켜 말할 수 있지만
而其理象之妙, 則先生獨默契焉.
그 이치와 형상의 오묘함은 선생이 홀로 말 없이 이해하셨다【묵계(默契): 말 없는 가운데 서로 뜻이 통한다는 뜻이다.】.
蓋朝夕俯仰其間, 有足玩以樂之,
대체로 아침과 저녁으로 그 사이를 내려보고 우러러보며 완미하고 즐거워하기만 했지
而無俟乎圖書之陳於前矣.
하도와 낙서가 앞에 진열되길 기다리진 않았다.
然則是亭之作, 而先生之名之也,
그러하니 이 정자의 지음과 선생이 이름 붙인 것은
惟無意於取義, 而邂逅相値,
오직 뜻을 취하려는 의도는 없이 해후하며 서로 만난 것이니
爲可喜耳.
기뻐할 만할 뿐이다.
豈區區象之云乎?
어찌 구구하게 상을 말할 것인가?
抑嘗讀『易』「大傳」, 古之制器用者,
또한 일찍이 『주역』 「대전」을 읽어보니 옛날에 그릇의 쓰임을 제작하는 사람이
棟宇舟車, 以至弓矢杵臼,
동량과 기둥과 배와 수레로부터 활과 화살과 공이와 절구에 이르기까지
所取象凡十有三卦.
형상을 취한 게 모두 13괘였다.
嗚呼! 聖人之神智創物,
아! 성인의 신이한 지혜로 사물을 창조함에
果有待於逐卦取象乎.
과연 괘를 쫓아다니고 상을 취할 걸 기다린 것이겠는가.
亦觀於其旣成而以爲有是象焉耳.
또한 이미 이루어진 걸 보고 이 상이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인가?
故仲尼著之而曰: “蓋取.”
그러므로 중니가 그걸 저술함에 “대체적으로 취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蓋之爲言, 若然而不必然之辭也.
‘대체’라는 말은 ‘그렇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말과 같다.
後有登是亭者, 觀於其法象,
훗날 이 정자에 오른 사람이 드러난 형상을 보고
苟亦曰: “蓋取乎.” 則可也;
만약 또한 “대체로 취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如必曰: “象之而後爲.”
만약 반드시 “형상이 있은 뒤에야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면
則非是亭之實也.
이 정자의 실체는 아니리라.
時癸酉季冬上旬, 從子昌協, 記. 『農巖集』 卷之二十四
계유(1693)년 12월 상순에 조카 창협이 기록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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