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작가와의 관계
『소화시평』 권상 99번에선 ‘문장을 지음으로 도를 깨쳤다[因文悟道]’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하면 조선시대의 문장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성리학이 송나라 시대에 발흥한 이후로 문장은 도를 싣는 도구여야 했다. 그래서 ‘글은 도를 실어야 한다[文以載道]’는 논의와 덧붙여 ‘도가 근본이고 글은 말단이다[道本文末]’와 같은 문학논쟁이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되었든 글을 통해 도를 전해주고, 그 글을 읽으면서 도를 깨쳐야 한다는 기본 정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선시대의 문장론을 현대에 적용해보면 전혀 어색한 말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글이란 어찌 되었든 저자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들이 녹아 있고, 그 사람이 고민하는 것들이 담겨 있으며,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김이 숨어 있다. 그래서 아예 미하엘 바흐친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한다.
‘말 속의 말(word in language)’은 반은 타자의 말이다. 이것이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화자가 그 말 속에 자신의 ‘지향’과 ‘억양’을 심어 말을 지배하고, 말을 자신의 의미와 표현의 지향성에 흡수할 때다. 이 수탈(appropriation)의 순간까지 말은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화자는 언어를 사전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의 혀 위에, 타자의 맥락 안에서, 타자의 지향에 봉사해서 존재한다. 즉, 언어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것에서 빼앗아 와서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Bakhtin, 1981: 293-294
성리학자들은 ‘우리가 도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사람을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 행동할 수 있다고 본 반면, 바흐친은 우리는 이미 수동적으로 누군가 쳐놓은 말의 그물에 걸려 생각을 수탈당한 연약한 존재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내뱉고 있는 말, 열심히 쓰고 있는 글은 태반이 ‘타자의 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타자의 것이 되어버린 말들을 빼앗아 와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미 자신이 쓰는 글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색깔이 저절로 담겨져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글을 쓰던지 성리학적인 색채가 물씬 묻어나는 글을 쓰게 되어 있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태도나 문장, 언어에 기독교가 묻어나게 되어 있다. 즉, 그가 지금 어떤 것에 심취하고 있는지 보려면 그가 쓰는 글, 또는 그가 쓰는 언어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글은 도를 실어야 한다[文以載道]’고 외치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글엔 성리학에서 말하는 도가 잔뜩 실린 글이 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글을 쓴 사람은 어떤 타자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 사람인지, 그리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야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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