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열녀전(兩烈女傳)
이덕무(李德懋)
어린 나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50년 동안 괴롭게 살다 죽은 열녀 이씨
松禾縣烈女李氏, 李弘道妻也. 與夫同年生, 盡婦道以事, 二十二歲, 夫死, 李不克哀, 常欲從死, 至呑針不死.
夫夢以告曰: “君之欲死誠矣, 然有定命, 不可易也. 五十年後吾死之日, 君其歸乎.” 李知其命, 不意於死.
然終身衣三年時素服, 敝輒縫補, 不易以新, 食糟席藁, 老始啜醬. 七月初五日, 夫死之日也, 至辛巳其日親具祭饌將祭, 忽憑於衾曰: “吾其死乎.” 怡然而逝.
數其夢夫之年歲, 果周五十矣, 夫死於寅時, 婦亦以其時終, 享年七十二.
嗚呼異哉! 天命之不可易如此夫. 鄕人書之善籍, 太守嘉之, 議㫌其閭.
결혼식날 자신을 데리러 오다 죽은 남편을 위해 죽은 열녀 이씨
李氏從女李氏, 亦烈女也. 少喪母, 育於其從姑.
李氏通『小學』ㆍ『史記』, 十七歲八月, 嫁龍崗縣金麟老, 麟老十月將卛而歸, 濟大江溺焉. 烈女聞其報, 大悲哀, 剔地以哭, 爪爲之流血. 明日哭奔夫家, 中流大慟曰: “吾夫欲卛我而溺, 從夫之死, 無憾.” 乃赴江, 左右衛之免, 及到夫家, 夜逃至江者數, 輒爲人覺不遂志.
烈女紿曰: “夫已矣吾生, 夫可祭.” 怡怡如平日, 家人不疑, 不爲守, 夜潛往溺于井.
日明衆覺而拯, 自足至胷背, 渾以紬纏之, 堅不可解. 其遺書處置家事, 訣舅姑與父母諸兄弟. 又曰: “願不脫紬纏與素服, 仍以斂之. 所大恨者, 夫屍之不得, 如終不得, 以夫之衣與髮同窆, 是吾志也.” 後終不得屍.
戊午, 監司上其事, 命㫌其閭. 烈女事後母至誠, 女死, 母悲憾而沒.
한 가문에서 나온 두 명의 열녀
君子歎曰: “人之有懿行, 一鄕不易, 况一鄕, 又一門也哉. 嗚呼! 烈女學於烈女, 終成烈女之名, 其亦異哉.
昔空同子涕泣, 作「六烈女傳」, 葢有憾於世也. 余於兩烈女, 亦如之也.
外黨朴叔汝秀氏松人, 小烈女, 又其妻兄. 爲我言其槩, 遂感嘆以書, 爲「兩烈女傳」. 又贊曰: “女之行, 胡使我起敬; 松之土, 胡兩烈女之傡.” 『嬰處文稿』 二
해석
어린 나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50년 동안 괴롭게 살다 죽은 열녀 이씨
松禾縣烈女李氏, 李弘道妻也.
송화현의 열녀 이씨는 이홍도의 아내다.
與夫同年生, 盡婦道以事,
남편과 동갑으로 아내의 도를 다해 섬겼고
二十二歲, 夫死, 李不克哀,
22세에 남편이 죽자 이씨는 슬픔을 가눌 길 없어
常欲從死, 至呑針不死.
항상 따라 죽으려 했고 바늘을 삼키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죽지 않았다.
夫夢以告曰: “君之欲死誠矣,
남편이 꿈속에서 말해줬다. “그대가 죽으려 하는 건 진심이지만
然有定命, 不可易也.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바꿀 수 없네.
五十年後吾死之日, 君其歸乎.”
50년 뒤에 내가 죽은 날에 그대도 이곳으로 돌아오리.”
李知其命, 不意於死.
이씨는 남편의 명령을 알고 죽음에 뜻을 두지 않았다.
然終身衣三年時素服,
그러나 종신토록 몸에 3년상의 소복을 입고
敝輒縫補, 不易以新,
해지면 문득 꿰매 새 옷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食糟席藁, 老始啜醬.
지게미를 먹고 짚에 앉으며 늙어서야 처음으로 미음을 먹었다.
七月初五日, 夫死之日也,
7월 5일은 남편이 죽은 날인데,
至辛巳其日親具祭饌將祭, 忽憑於衾曰:
신사(1701)년 그 날에 이르러 친히 제사용 반찬을 갖추고 제사지내며 문득 이불에 기대 말했다.
“吾其死乎.” 怡然而逝.
“내가 죽겠구나.” 만족한 듯 죽었다.
數其夢夫之年歲, 果周五十矣,
남편을 꿈꾼 해를 헤아리니 과연 50년이었고,
夫死於寅時, 婦亦以其時終, 享年七十二.
남편은 인시에 죽었는데 아내도 또한 그때에 죽었으니 향년 72세였다.
嗚呼異哉! 天命之不可易如此夫.
아! 기이하다. 천명을 바꿀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
鄕人書之善籍, 太守嘉之, 議㫌其閭.
시골 사람들이 선행을 기록했고 태수는 좋게 여겨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우길 의론했다.
결혼식날 자신을 데리러 오다 죽은 남편을 위해 죽은 열녀 이씨
李氏從女李氏, 亦烈女也.
이씨의 조카 이씨도 또한 열녀다.
少喪母, 育於其從姑.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사촌고모에 양육되었다.
이씨는 『소학』과 『사기』에 통달했고 17살 8월에 용강현의 김인노에게 시집가니
麟老十月將卛而歸, 濟大江溺焉.
인노는 10월에 장차 데리고 돌아오려 큰 강을 건너다 물에 빠졌다.
烈女聞其報, 大悲哀,
열녀는 그 사실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剔地以哭, 爪爲之流血.
땅을 긁으며 곡하니 손톱에선 피가 났다.
明日哭奔夫家, 中流大慟曰:
다음날 남편집에 통곡하며 달려가 중류에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吾夫欲卛我而溺, 從夫之死, 無憾.”
“나의 남편은 나를 데려오려다 빠져죽었으니 남편의 죽음을 따라도 섭섭함이 없습니다.”
乃赴江, 左右衛之免,
곧 강으로 달려갔지만 좌우에서 말려 죽질 못했고,
及到夫家, 夜逃至江者數,
남편의 집에 도착함에 미쳐 밤에 도망쳐 강으로 달려간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輒爲人覺不遂志.
문득 사람이 알아차려 뜻을 완수하질 못했다.
烈女紿曰: “夫已矣吾生, 夫可祭.”
열녀는 “그만두겠습니다. 내가 살아야 남편을 제사 지낼 수 있으니,”라고 속였다.
怡怡如平日, 家人不疑, 不爲守,
화평한 것이 평일과 같기에 집사람이 의심하지 않아 지키질 않으니,
夜潛往溺于井.
밤에 몰래 가서 우물에 빠졌다.
日明衆覺而拯, 自足至胷背,
날이 밝자 사람들이 알아 건져내니 발부터 배와 등에 이르기까지
渾以紬纏之, 堅不可解.
혼연히 명주로 묶었는데 꽉 묶여 풀리질 않았다.
其遺書處置家事, 訣舅姑與父母諸兄弟.
유서엔 집안 일을 처리하는 것과 시아버지와 친정부모와 모든 형제에 영결하는 내용을 썼다.
又曰: “願不脫紬纏與素服, 仍以斂之.
또한 써있었다. “원컨대 묶인 명주와 소복을 벗기지 마시고 그대로 염해주세요.
所大恨者, 夫屍之不得,
크게 한스러운 것은 남편의 시신을 찾질 못한 것이니,
如終不得, 以夫之衣與髮同窆, 是吾志也.”
만약 끝내 찾지 못한다면 남편의 옷과 머리카락과 함께 하관해주세요. 이것이 저의 뜻입니다.”
後終不得屍.
훗날 끝내 남편의 시신을 찾질 못했다.
戊午, 監司上其事, 命㫌其閭.
무오(1738)년에 감사가 그 일을 아뢰어 그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길 명했다.
烈女事後母至誠, 女死, 母悲憾而沒.
열녀는 계모 섬기를 지극정성으로 했는데 딸이 죽자 계모도 슬퍼하다가 죽었다.
한 가문에서 나온 두 명의 열녀
君子歎曰: “人之有懿行,
군자가 탄식하며 말한다. “사람에게 아름다운 행실이 있기는
一鄕不易, 况一鄕, 又一門也哉.
한 마을에서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한 고을이면서 또한 한 가문임에랴.
嗚呼! 烈女學於烈女, 終成烈女之名, 其亦異哉.
아! 열녀가 열녀에게서 배워 끝내 열녀의 이름을 이루었으니 또한 기이하구나.
昔空同子涕泣, 作「六烈女傳」,
옛적에 공동자 이몽양이 눈물을 흘리며 「육열녀전」을 지은 것은
葢有憾於世也.
대체로 세상에 섭섭함이 있어서였으니,
余於兩烈女, 亦如之也.
나는 두 열녀에 대해서 또한 그와 같다.
外黨朴叔汝秀氏松人, 小烈女, 又其妻兄.
외척 박녀수씨는 송화현 사람이고 작은 열녀는 또한 처형이다.
爲我言其槩, 遂感嘆以書, 爲「兩烈女傳」.
나에게 대강을 말해주어 마침내 감탄하며 써서 「양열녀전」을 지었다.
又贊曰: “女之行, 胡使我起敬;
또한 찬하겠다. “계집의 행실이 어째서 나에게 공경을 일으키는 것인가.
松之土, 胡兩烈女之傡.” 『嬰處文稿』 二
송화의 땅이 어째서 두 열녀를 나게 했는가.”
인용
이광정 薌娘謠
윤광소 烈女香娘傳
이덕무 香娘詩 幷序
이상정 書林烈婦傳後
박지원 烈女咸陽朴氏傳
맹교 烈女操
'산문놀이터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희 - 간천리설(適千里說) (0) | 2019.11.14 |
---|---|
잡언 사 - 21. 우리나라 고문의 흐름 (0) | 2019.11.14 |
이덕무 - 간서치전(看書痴傳) (0) | 2019.11.14 |
김득신 - 와설(猧說) (0) | 2019.11.13 |
이식 - 두실기(斗室記) (0) | 2019.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