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김
김가기(金可紀)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사람으로, 당(唐) 나라에 들어가 과거를 하였다. 신선(神仙)의 술(術)을 좋아하여 중국에서 이름이 있었다. 당 나라의 사명(使命)을 받고 신라로 돌아오는데, 당시의 문장 장효표(章孝標)는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주었다. “想把文章合夷樂 幡桃花下醉人蔘.”
김경서(金景瑞)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에 올랐고, 1618년에 명 나라가 건주위의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과 함께 출전했으나, 부차(富車)의 싸움에서 패하여 원수 강홍립이 적군에 항복함으로써 그 역시 적의 포로가 되었었다.
김광현(金光炫)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김상용의 아들이다. 광해군 때 진사에 합격하였다. 어지러운 조정을 보고 벼슬길에 뜻을 끊었다. 인조반정 후 벼슬에 올라 부제학이 되었으나, 간신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삼수로 귀양갔다. 시문에 능하였다.
김귀영(金貴榮)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극기(金克己)
고려 때 시인. 호는 노봉(老峰). 어려서부터 문명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초야에서 시를 즐겼음. 저서에는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김뉴(金紐)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쌍계재(雙溪齋)인데,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시(詩)·서(書)·금(琴)에 모두 뛰어나서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김도원(金道源)
도원(道源)은 김세렴(金世濂)의 자(字)이다.
김돈서(金惇敍)
돈서(惇敍)는 김부륜(金富倫)의 자이다.
김득지(金得之)
득지(得之)는 김대덕(金大德)의 자(字)이다.
김리만(金履萬)
호는 학고(鶴皐). 숙종 때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양산 군수를 지냈다.
김사일(金士逸)
사일(士逸)은 김반(金槃)의 자이다.
김사재(金思齋)
사재(思齋)는 조선조 학자 김정국(金正國)의 호이다. 자는 국필(國弼). 그는 중종 때 예·병·형조 참관(禮兵刑曹參判)을 역임했고, 저서에는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와 사재집(思齋集) 등이 있다.
김사중(金士重)
사중(士重)은 김천일(金千鎰)의 자이다. 김천일이 담양 부사를 지냈다.
김상복(金尙宓)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친제(親弟)이다.
김생(金生)
신라 시대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고 했던 서예가이다. 『三國『사기(史記)』
김석여(金錫汝)
석여(錫汝)는 김홍운(金洪運)의 자, 동방자(東方子)는 그의 호이다.
김성기(金聖基, ?~?)
일명 성기(聲起). 자는 자호(子湖, 子豪)·대재(大哉), 호는 낭옹(浪翁)·어옹(漁翁)·어은(漁隱)·조은(釣隱)·강호객(江湖客). 젊어서는 활을 만드는 조궁장(造弓匠)이었으나 거문고를 배워 뛰어난 기량을 보여, 노년에는 서호(西湖)에 배를 띄우고 소일하면서 제자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다. 당시의 시조작가 김천택(金天澤)과 교분이 있었으며, 자연을 읊은 「강호가(江湖歌)」 다섯 수 등 여덟수의 시조작품이『청구영언』등에 전한다. 특히, 병화로 인하여 전승이 끊어져 부르는 사람이 없던 평조삭대엽(平調數大葉)의 곡을 전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를 배운 제자 남원군(南原君) 이설(李樆) 등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락들을 정리하여, 1728년에 『낭옹신보(浪翁新譜)』를 만들었다. 1779년에 편찬된 『어은보(漁隱譜)』는 『낭옹신보』를 저본으로 필사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지(金成之)
성지(成之)는 김자점(金子點)의 자(字)이다.
김숙부(金肅夫)
조선조 문신 김우옹(金宇顒 1649~1723)의 자가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연(金緣)
중종(中宗) 때의 문신으로, 자가 자적(子迪)이고 호가 운암(雲巖)인데,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경성 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가 김안로가 쫓겨난 다음에 사간(司諫)이 되었다.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을 이른다. 열경(悅卿)은 그의 자(字)이다.
김용행(金龍行)
자는 순필(舜弼), 호는 석파(石坡) 또는 포도인(泡道人).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서증손(庶曾孫)이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가까웠고, 뛰어난 문재로 크게 인정받았다. 기이한 행동을 좋아하고, 검속함이 적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에 걸려 객사했다. 『영영쇄쇄집(零零瑣瑣集)』 몇 권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김자중(金子中)
자중(子中)은 김시양(金時讓)의 자(字)이다.
김장(金張)
한 선제(漢宣帝) 때 대관(大官)을 지낸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의 병칭이다, 두 가문은 7대(代) 동안 임금을 가까이 모시어 함께 영화를 누렸다. / 유의어: 권문귀족(權門貴族).
김장지세주(金張之勢冑)
한(漢) 나라 김일제(金日磾)의 자손 장안세(張安世)의 자손이 대대로 좋은 벼슬을 하였다.
김적(金迪)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충숙왕(忠肅王)이 원(元)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한 공이 있어 뒤에 2등 공신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김중숙(金重叔)
조선조의 문신 김응남(金應南 1546~1598)의 자가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김중윤(金仲胤)
중윤(仲胤)은 김기종(金起宗)의 자이다.
김중정(金仲靜)
중정(仲靜)은 김상복(金尙宓)의 자(字)이다.
김진항(金鎭恒)
자는 중산(仲山), 호는 녹문(鹿門). 몇 차례의 벼슬 기회를 마다한 채 시문에 묻혀 살았다.
김창흡(金昌翕)
호는 삼연(三淵), 자는 자익(子益), 본관은 안동(安東),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창집(昌集)·창협(昌協)의 아우인데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경기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김충(金冲)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본래 최충헌(崔忠獻) 집의 종으로서 무관(武官)에 진출하여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김피부(金皮膚)
김피부(金皮膚)·민부지(閔不知)·허초혼(許初昏)·조삼경(趙三更)는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관리를 기롱하는 말이다. 중종 12년을 전후한 시기에 노비의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에 김근사(金謹思)와 민원(閔㥳)이, 사의(司議)에는 허인(許璘)과 조문린(趙文璘)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송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우매함을 기롱하여 김피부·민부지·허초혼·조삼경이라고 하였다.’피부’는 겉만 다룬다는 뜻이고, ‘부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며, ‘초혼’은 어둑하다는 뜻이고, ‘삼경’이란 매사에 캄캄하다는 뜻인 듯한다.
김회여(金晦汝)
회여(晦汝)는 김광현(金光炫)의 자(字)로, 계곡의 처남이다.
김흠운(金歆運)
내물왕(柰勿王)의 8세손인데 젊어서 화랑(花郞) 문로(文努)의 문에 종유하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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