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58. 나
나계(羅計)
나후성(羅睺星) 계도성(計都星). 성명가(星命家)가 나후는 천수성(天首星)이라 하고 계도는 천미성(天尾星)이라 하는데 서로 마주 보고 행하여 모든 별을 난절(攔截)한다 하였다.
나공원(羅公遠)
당 나라 명황(明皇)이 나공원(羅公遠)이란 도사(道士)를 따라 월궁(月宮)에 갔다가 온 일이 있다 한다.
나관극청살(羅貫極靑殺)
나관(羅貫)은 삼라만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청살(靑殺)은 사책(史冊)을 뜻하는 것으로 온갖 사책에 나열된 모든 것들을 두루 박람했다는 뜻이다.
나국(拿鞠)
범죄혐의자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의금부의 당상관(當上官)이 회좌(會座)하여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나처(拿處)는 나국하여 처결(處決)하는 것이다.
나군(羅裙)
부녀자의 화려한 비단 치마로, 탁문군을 가리킨다.
나궁(螺宮)
절을 말한다.
나기(羅綺)
성장(盛裝)한 여인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에 “봉오리 터지는 복사꽃 봄을 이기지 못하는 듯. 기녀(妓女)들 모인 속에, 첫째 가는 인물 있네[小桃破萼未勝春 羅綺叢中第一人]”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13 「답진술고(答陳述古)」
나나(哪哪)
나례 때에 악사, 기생, 악공 들이 지르는 소리이다.
나대(螺黛)
눈썹을 그리는 도구로서 소라 껍데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라(攭攭)
깃이나 털이 없는 모양이다.
나라곡(那羅谷)
불가의 말로 극락(極樂)의 천계(天界)를 가리킨다.
나례(儺禮)
고려 정종(靖宗) 이후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악귀를 쫓던 의식이다.
나말(羅襪)
① 수선화의 자태를 예찬한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 시에 “능파선자 버선에 먼지를 날리면서 물 위를 사뿐사뿐 초승달을 따라가네[凌波仙子生塵襪 水上盈盈步微月]”라고 하였다.
② 기생(妓生)을 가리킨다.
나말종포역로방(羅襪終抛驛路傍)
양귀비가 마외역(馬嵬驛)에서 죽어서 그 역 옆에다 그대로 묻고 갔었는데, 그 후에 난리가 평정된 뒤에 다시 장사지내려고 팠더니, 시체는 없어지고 그녀가 신었던 버선 한 짝만이 있었다 한다.
나몽뢰(羅夢賚)
몽뢰(夢賚)는 나만갑(羅萬甲)의 자(字)이다.
나무(南無)
중생(衆生)이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歸依)하여 경순(敬順)한다는 말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부처님의 마음으로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나부(懦夫)
고풍은 드높은 풍도(風度)이고 나부는 연약하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下에 “백이의 풍도를 듣게 되면 무식한 탐부(貪夫)는 청렴할 줄 알고 나약한 자는 의로운 뜻을 세울 줄 알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고 하였다.
나부(羅敷)
곡명(曲名). 옛적 나부(羅敷)라는 여인이 들에서 뽕을 따는데 군수(郡守)가 지나다가 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말을 멈추고 가지 않았다. 나부는 말하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으니 그만 가시오[使君自有婦羅敷自有夫].”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고금주(古今注)』 음악 조(音樂條)에 “陌上桑 出秦氏女子 秦氏邯鄲人 有女名羅敷 爲邑人千乘王人妻 王仁後爲趙王令 羅敷出採桑於陌上 趙王登臺 見而悅之 因飮酒欲奪焉 羅敷力彈笙 乃作陌上歌以自明焉”이라고 보인다. / 유의어: 나부자유부(羅敷自有夫) / 인용: 祖江行(신유한)
나부(羅浮)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신선의 도를 닦았다는 곳으로, 도교(道敎)에서 ‘제칠동천(第七洞天)’으로 부르는 산 이름이다.
나부구장(羅浮舊障)
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다가 매화 선녀와 만나 흥겹게 어울려 술을 마시고 취했는데, 잠을 깨고 나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 있더라는 전설이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용성록(龍城錄)」에 실려 있다.
나부립완부렴(懦夫立頑夫廉)
『맹자(孟子)』 「만장(萬章)」 下에서 “맑고 개결(介潔)한 백이(伯夷)의 풍(風)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도 일어설 뜻이 있고 완(頑)한 사람도 청렴하여진다.”라고 하였다.
나부매(羅浮梅)
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 아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숲 사이의 주막에서 소복을 입은 미인이 그를 맞아 함께 정겹게 술을 마시다 취해 자고 일어나 보니 미인도 주막도 없고 자신은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한다. 『상우록(尙友錄)』 卷十六
나부몽(羅浮夢)
수(隋)의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의 매화촌(梅花村)에 있는 주점(酒店) 가에서 소복(素服)으로 단장한 미인(美人)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자신만 큰 매화나무 밑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달은 지고 삼성(參星)은 기울었으며 위에서는 비취(翡翠)가 지저귈 뿐이었다는 고사이다. 『용성록(龍城錄)』
나부산(羅浮山)
① 중국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에 있는데, 이 산에는 매화가 많아서 ‘나부매(羅浮梅)’가 유명하다. 그리하여 소식(蘇軾)의 매화에 대한 시에 “나부산 아래 매화촌, 흰 눈으로 뼈를 이루고 얼음으로 넋을 이루었네[羅浮山下梅花村 玉雪爲骨氷爲魂]”라고 하였다. 『소동파집(蘇東坡集)』 後集 卷四 松風亭下梅花盛開 再用前韻
②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산으로, 백여 리를 길게 뻗어 있고 4백여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월(粵)지방의 명산으로 불린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그곳에서 선술(仙術)을 얻었다 하여 흔히 선산(仙山)으로 이해된다.
③ 광동성(廣東省)의 동강(東江) 북안(北岸)에 있는 산 이름으로,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꿈속에서 매화 선녀(梅花仙女)를 만났다고 전하므로, 후대에는 매화에 대해 시를 읊을 때 흔히 인용한다.
나부접(羅浮蝶)
중국 광동(廣東) 나부산(羅浮山)에서 나는 나비이다. 크기는 한 자 정도이며 봄이 되면 번데기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데 문채가 각각 달라 비록 수백 마리가 떼지어 있어도 한 마리도 같은 모양이 없으므로 산동 사람들이 소봉황(小鳳凰)이라 이른다고 한다. 『광동신어(廣東新語)』
나부춘(羅浮春)
소식(蘇軾)이 혜주(惠州)에 있을 적에 만든 술 이름인데, 즉 혜주에 있는 나부산(羅浮山)에서 취한 이름이다.
나부춘몽(羅浮春夢)
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는데 해가 저물 때에 숲 사이 어느 집에 한 미인이 소복담장(素服淡粧)으로 나와 영접하는데 향기가 정신을 황홀케 하였다. 사웅이 미인과 함께 술집에 가서 즐겨 놀았는데 옆에 푸른 옷 입은 동자(童子)가 노래를 불렀다. 사웅이 취하여 자다가 새벽에 깨어 보니 매화나무에 푸른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미인은 화신(花神)이었던 것이다.
나사(蘿絲)
덩굴식물인 토사(菟絲)와 여라(女蘿)가 서로 뒤엉키듯 두 집안이 혼인 관계로 밀접하게 맺어진 것을 비유하는 시어이다.
나생(羅生)
‘나란히 자라나다’라는 뜻이다.
나소위(羅紹威)
후양(後梁)의 정치가이며 학자이다. 자는 단기(端己), 벼슬이 태사(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저서에 투강동집(偸江東集)이 있다.
나악주(羅鄂州)
송(宋) 나라 나원(羅願)을 가리킨 말로, 나원이 악주(鄂州)의 장관(長官)을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사장(詞章)의 대가(大家)로 이아익(爾雅翼)을 지었다. 『송사(宋史)』 「나원전(羅願傳)」
나양(裸壤)
나라 이름이다. 이 나라는 사람들이 무례하여 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생활을 한다고 한다.
나양봉(羅兩峯)
청 나라 양주(揚州) 사람인데 이름은 빙(聘), 자는 돈부(遯夫), 호는 양봉이며 또는 화지사승(花之寺僧)·화지인(花之人)·주초시림(朱草詩林)이라 한다. 김농(金農)의 제자, 김동심(金冬心)의 고제(高弟)로서 시에 능하고 그림을 잘 하였으며, 더욱이 화매(畫梅)로써 해내외에 독절(獨絶)하였다.
나양해장보(裸壤駭章甫)
소인이 군자를 도리어 나쁘게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나양은 벌거벗은 몸에 문신(文身)한 것을 말하고, 장보(章甫)는 은(殷) 나라 때의 관(冠) 이름인데, 공자(孔子)가 항상 이 관을 썼으므로, 전하여 유자(儒者)의 뜻으로 쓰인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나연(那衍)
서북 지방의 야인(野人)들이 주장(主將)을 높여 부르던 이름이다.
나옹(懶翁)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명승(名僧) 왕사(王師) 혜근(惠勤)의 법호이다. 혹은 강월헌(江月軒)이라고도 하였다. 나옹은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살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卷六 「여주(驪州)」
나옹탑(懶翁塔)
나옹(懶翁)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고승. 우왕(禑王)2년(1376)에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도중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여 거기에다 부도(浮屠)를 세웠다.
나와엽전방성종(騾臥喦前訪聖蹤)
법주사 전설에 “신라 중 의신(義信)이 노새로 경(經)을 싣고 와 처음 이 절을 이룩했다.”고 한다.
나월(蘿月)
나사(螺師)의 헌(軒) 이름이다.
나융(懶融)
선사(禪師)의 이름이다.
나은(羅隱)
당말(唐末) 시인. 여러번 과거에 응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나응서(羅應瑞)
나해봉(羅海鳳)의 자(字)이다.
나작굴서(羅雀掘鼠)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말기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張巡)이 3만의 군사로 수양성을 지키게 되었다. 그는 안녹산의 부장인 윤자기(尹子琦)가 이끄는 10만 대군과 죽음을 무릅쓰고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다급해진 장순은 임회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함을 알렸으나, 평소 장순을 시기하던 그는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포위된 채 몇 달이 지나자 성 안의 식량은 바닥났고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그물을 쳐 참새를 잡고 굴을 파 쥐를 잡아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안타까운 마음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죽을 끓여 먹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돼 끝내 반란군에게 성을 내주고 말았다. 『당서(唐書)』 「장순전(張巡傳)」
나작문(羅雀門)
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적문(翟門)이라고도 한다.
나잔승(懶殘僧)
당(唐)의 고승(高僧) 명찬 선사(明瓚禪師)이다. 성품이 게을러 언제나 다른 중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먹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한다.
나장(裸葬)
‘시신을 나체로 매장하는 것’을 이른다.
나장(羅將)
일명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며, 의금부·형조·사헌부·사간원·오위도총부·전옥서·평시서 등 중앙의 사정(司正)·형사업무를 맡는 관서에 배속되어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거나 귀양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다. / 인용: 용재총화(성현)
나전(螺鈿)
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을 여러 형상으로 박아 붙이어 장식한 공예품이다.
나조(羅趙)
서법(書法)의 명가(名家)로 일컬어졌던 후한의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의 병칭인데, 장지(張芝)가 이들을 평하면서 “내가 위로 최(崔)·두(杜)와 견주기에는 부족하다마는, 아래로 나(羅)·조(趙)와 비교한다면 여유가 있다.”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法書要錄 卷1 引 採古來能書人名』 소식(蘇軾)의 시에도 “종요(鍾繇)와 장지(張芝)에 뒤지지 않는다고 그대 자부하는데, 나 역시 나휘나 조습에 비한다면 우월하다오[不減鍾張君自足 下方羅趙我亦優]”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6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
나졸(懶拙)
게으르고 졸렬하여 세상의 공명(功名)에 뜻이 없는 것을 말한다.
나찬(懶瓚)
원(元) 나라 무석(無錫) 사람인 예찬(倪瓚)을 말한다. 호는 운림(雲林)으로 시·서·화가 삼절(三絶)이었으며, 일찍이 난찬(懶瓚)이라 서명하였다.
나체(拿遞)
벼슬아치가 죄로 인해 붙잡혀서 갈리는 일을 말한다.
나타제호(懶惰啼呼)
도연명(陶淵明)이 아들을 책망하는 뜻에서 지은 책자(責子)라는 시에 “아서(阿舒)는 벌써 나이 열여섯이건만 나태하여 아직 배필이 없네.”하였고, 서인효전찬(庶人孝傳贊)에서는 “은도(殷陶)는 여남(汝南) 사람으로 나이 열두 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마침 큰 뱀이 집의 문에 가로누워 있었다. 이에 친척들이 모두 위험하다고 자리를 피하라 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의 영구(靈柩)가 있으므로 피할 수 없다 하면서 더욱 크게 슬피 울었다.”라고 하였다.
나필(羅泌)
송(宋) 나라 사람이다. 자는 장원(長遠), 노사(路史) 47권을 지었는데 넓은 인용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국명(國名)을 고증한 것은 더욱 정미롭다.
나함택사(羅含宅舍)
진(晉) 나라 나함이 덕망이 높아 관사(官舍)에 있을 적에는 흰 참새가 모여들었고 치사(致仕)하고 나서 집에 거할 적에는 난초와 국화가 홀연히 뜰에 무더기로 피었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卷92 「문원전(文苑傳)」 나함전(羅含傳)
나향독우경출주(懶向督郵傾秫酒)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적에 팽택현의 공전(公田)에 모두 차조[秫:만 심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항상 술에 취하게만 해주면 만족하겠다.”하였고, 또 그 후에는 군(郡)에서 독우(督郵; 지방 감찰관)가 나왔을 때, 아전이 관복을 정제하고 독우를 알현해야 한다고 말하자, 도잠이 탄식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九十四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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