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보은사에 숙박하며 주지 우사에게 줬다. 절의 옛 이름은 신륵사이며 혹은 벽사라 한다. 예종 때 개창되어 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지금 판액을 하사했다.
야박보은사하 증주지우사 사구명신늑혹운벽사 예종조개창극굉려사금액(夜泊報恩寺下 贈住持牛師 寺舊名神勒或云甓寺 睿宗朝改創極宏麗賜今額)
김종직(金宗直)
報恩寺下日曛黃 繫纜尋僧踏月光
棟宇已成新法界 江湖猶攪舊詩腸
上方鐘動驪龍舞 萬竅風生鐵鳳翔
珍重旻公亦人事 時將菜把問舟航
해석
報恩寺下日曛黃 보은사하일훈황 | 보은사 밑에서 해는 저물고, |
繫纜尋僧踏月光 계람심승답월광 | 배를 매고 스님 찾아 달빛을 거니네. |
棟宇已成新法界 동우이성신법계 | 동우는 이미 완성되어 새로운 법계이고 |
江湖猶攪舊詩腸 강호유교구시장 | 강호는 오히려 예전의 시 창자 흔드는 구나. |
上方鐘動驪龍舞 상방종동여룡무 | 상방의 종이 울리니, 여룡이 춤추고, |
萬竅風生鐵鳳翔 만규풍생철봉상 | 온갖 구멍에서 바람 나오니 절 뒷산인 철봉산이 난다. |
珍重旻公亦人事 진중민공역인사 | 민공【민공(旻公): 중을 가리킨 말임. 宋 나라 黃庭堅의 『和范信中寓居崇寧遇雨詩』 에 “경공은 백성의 곡식 싹이 서지 못할까 걱정하고 민공은 나무가 물에 밀려 뽑힐까 걱정하네 두 선승이 수역을 여는 데에 뜻을 두어 세밑에 집을 지으니 백도에 해당하겠네[慶公憂民苗未立 旻公憂木水推去 兩禪有意開壽域 歲晩築室當百堵]” 하였다. 『黃山谷詩集 卷二十』】을 진중하게 하는 것도 또한 사람의 일이니, |
時將菜把問舟航 시장채파문주항 | 때로는 소채(蔬菜)를 갖추어 뱃길을 물어보네. 『佔畢齋集』 卷之十二 |
해설
이 시는 김종직(金宗直)이 46살에 내직에 임명되었다가 선산부사로 내려가던 도중에 여주에 있는 신륵사 앞에 배를 대고 주지 우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남겨 준 시이다. 제목 아래에는 “절의 옛 이름은 신륵이고 혹은 벽사라고도 하는데, 예종 때에 절을 고쳐 지어서 극히 크고 화려하게 하며, 지금의 편액을 하사하였다[寺舊名神勒, 或云甓寺, 睿宗朝改創, 極宏麗, 賜今額].”라는 말이 실려 있다.
신륵사 아래에 해가 어둑어둑해지자, 절 앞인 여강에 닻줄을 매고 달빛을 밟으며 스님을 찾는다. 절의 기둥과 집이 이미 이루어져 새로운 불국사(佛國土)가 이루어졌는데, 시인은 절과 강호에 감탄하여 시 생각이 절로 난다. 절에 종이 울리니 이에 호응한 듯 여강(驪江)의 용이 춤을 추는 듯하고, 만물의 구멍에서 바람소리가 나니 절의 뒷산인 철봉산(鐵鳳山)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두보(杜甫)가 민공이라는 스님에게 진중했듯이 자신도 주지에게 때로는 채소 다발 갖고 뱃길을 물어야지.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62번에서, “점필재 김종직은 선산사람이다. 점필재를 두고 국조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佔畢齋金宗直, 善山人也. …… 所謂冠冕國朝者, 豈虛言哉!]”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83번에서 경련(頸聯)에 대해 “우리나라 시는 위로 고려시대부터 아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볼만한 경련이 적지 않다. 점필재 김종직의 「신륵사」에 ……라 하였는데, 엄하고 무겁고 크고 밝아서 마치 균천광악이 창공을 크게 울린 것과 같다[我東之詩, 上自麗朝, 下至近代, 警聯之可觀者, 不爲不多. …… 金佔畢齋神勒寺詩 …… 嚴重洪亮, 如勻天廣樂].”라 하였다.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94~95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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