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한시대(前漢時代)
1. 개요
① 특징
1.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郡縣制)의 장점을 살린 군국제(郡國制)로 한왕조의 기틀을 접음.
2. 초기엔 한신과 팽월 등 창업 공신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엔 선정이 베풀어져 태평성대였음.
3. 무제(武帝)는 대내적으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운영할 방안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론 흉노를 정벌하고 변방을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함.
4.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혼란이 있어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이때부터 후한임).
5. 신은 제도개혁에 실패하여 15년 만에 망하여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다시 한왕조를 세우게 됨.
② 한나라의 두 시기
전한(前漢) | 후한(後漢) |
서한(西漢) 수도가 서쪽 장안에 있음 |
동한(東漢) 수도가 동쪽 낙양에 있음 |
2백여년 | 2백여년 |
③ 한 왕조 말기의 정세
1. 광무제는 내치에 힘을 기울여 경제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도록 하였고 반초(班超)를 시켜 서역제국과의 교역에 힘씀.
2. 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는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짐.
3. 외척 양기에 이은 2차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인물들이 희생됨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남.
4. 장각(張角)은 태평도를 조직하고 한 타도의 황건적의 난을 일으켜 후한 왕조를 붕괴시키고 삼국시대를 열음.
2.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요인
① 한고조의 성공요인 문답
1. 5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둔 유방은 기원전 202년에 즉위식을 가지고 황제가 되었으며 성대한 잔치를 벌임.
2. 천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을 묻자, 고조가 항우보다 거만하지만 공적이 있는 자들을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라고 왕릉(王陵)이 말함.
3. 그러자 고조는 장량ㆍ소하ㆍ한신의 인걸(人傑)을 잘 쓴데 반해 항우는 범증마저도 잘 쓰지 못했기에 잃은 거라 말하니, 모두가 탄복함.
3. 한나라 수도 이전과 체제 정비
① 수도 결정문제
1. 한고조는 주왕실의 융성을 이어받고 싶었고 대부분의 군신들의 낙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함.
2. 장량은 낙양이 교통은 편하나 공격을 받기 쉽기에 진나라 도읍인 관중이 기름진 평야가 있어 천하의 요새이기에 관중으로 삼아야 한다고 함.
3. 장량의 판단을 믿은 고조는 관중 근처 장안에 새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궁전인 미앙궁(未央宮)을 지음.
② 제도 정비
1. 소하(蕭何)ㆍ숙손통(叔孫通) 등에게 여러 문물과 제도를 제정하게 했는데, 대부분은 진의 제도를 계승함.
2.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제도의 운용은 오히려 민심의 향배에 맡기고 커다란 범주만을 규제하는 방침을 택함.
3. 진나라의 연좌법이나 삼족구멸법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조세도 수확의 1/15로 경감함.
4. 왕권 강화를 위한 공신 숙청작업
① 군국제의 실시
1. 공신에게 왕의 봉직을 주어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팽월을 양왕(襄王)으로 삼음으로 여러 왕국들이 생겨 다시 전국시대로 돌아간 형세가 됨.
2.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북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에게 분봉하여 나누어 다스리게 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함.
② 공신의 처단
1. 한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異性) 제후왕들은 커다란 위협이 되어 모반의 누명을 씌워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함.
2. 한신의 역모죄로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외치며 고조 10년 조(趙) 재상 진량(陳倆)이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다가 탄로가 나서 결국 죽임을 당함.
3. 이성(異性) 제후들의 숙청 작업을 하고 모두 유씨 일족을 왕으로 만들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함.
③ 한고조와 전횡의 이야기
1.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한고조로 등극하자, 제왕(齊王) 전횡(田橫)은 처형될까 두려워하며 500명의 식객을 끌고 오호도(鳴呼島)로 들어감.
2. 유방은 그들이 반란세력이 될까 두려워하며 섬에서 나오길 회유하고 협박하기도 하니, 전횡은 2명의 식객만을 데리고 섬에서 나옴.
3. 그러나 가는 도중에 왕이었던 자신이 유방의 신하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치욕으로 느끼며 자살했고, 식객은 그 목을 유방에게 바침.
4. 유방은 500명의 식객도 나오길 회유했고, 500명의 식객들은 전횡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 또한 그곳에서 모두 자살함. 『사기(史記)』, 「전담열전(田儋列傳)」
▲ 어청도 치동묘에 있는 전횡장군 초상. 담양 전씨의 선조라 여겨져 제사를 지낸다.
5. 한고조 이후의 혜제 등극과 여후의 막장드라마
① 정세와 태자 책봉 문제
1. 유씨 정권도 처음부터 견고한 것은 아니어서 고조의 부인 여후(呂后) 일족이 한바탕 정권을 휘두르던 시기가 지나서야 유씨 정권이 뿌리 내림.
2. 고조는 경포(黥布) 토벌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날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그때 고조는 여후를 멀리하고 후궁 척부인을 총애하고 있었음.
3. 고조는 영(盈)이 유약하므로 불만이 있던 터에 척부인이 낳은 여의(如意)를 태자로 책봉하려다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정하지 못하고 죽음.
② 혜제(惠帝)의 등극과 척부인ㆍ여의에 대한 여후의 보복
1. 태자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혜제(惠帝)로 등극했으나 유약하고 나이도 어려 실권은 여후가 장악하게 됨.
2. 여후는 척부인을 한 번에 죽이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아 서서히 고통을 주었음.
3. 조왕으로 봉해진 여의를 죽이기 위해 불렀으나 혜제가 여의와 항상 함께 했기에 암살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음.
4. 그러다가 혜제가 사냥을 나간 사이 술에 독을 타서 마시게 하여 여의를 죽임.
5. 척부인을 인간돼지로 삼아 혜제에게 보여주자 유약함에 상처를 받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여 서서히 파멸해감.
6. 여태후 한나라 정권을 장악하다
① 소제(少帝) 공(恭)의 등극과 여태후의 득세
1.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태자가 그 뒤를 이어 황제인 소제(少帝) 공(恭)이 되었기에 여태후의 전횡은 더욱 심해짐.
2. 여태후는 어린 황제가 자기에게 반항하자 폐위시켜 소제(少帝) 홍(弘)을 세움.
3. 연호를 원년(元年)으로 하지 않고 전 황제를 이어 5년으로 함.
4. 여태후는 여씨 일족으로 왕을 세워 둘째 오빠 조왕(趙王) 여록(呂祿)에게 북군 지휘를, 양왕(襄王) 여산(呂産)에게 남군 지휘를 맡겨 군대를 장악함.
5. 여태후의 집권 시기는 혜제 재위 8년을 포함하여 15년 간에 이름.
▲ 여씨 일족 토벌 작전(삽화 - 권미영)
② 여태후의 말기
1. 기원전 180년 여태후는 세상을 떠났음.
2. 그녀가 죽자 제왕(齊王) 유양(劉襄)은 여씨를 타도하기 위해 제후에게 격문을 보내 여씨를 몰아내고 유씨의 한왕조를 재건함.
3. 고조의 아들 유항(劉恒)을 제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바로 문제(文帝)임.
▲ 다시 유씨 왕족을 세우기 위해 얘기하고 있다. 이어서 등장한 유씨 왕조는 한나라를 전성기로 이끈다.
7. 전한의 기틀을 제대로 닦은 문경지치의 시대
① 문제(文帝)의 국치
1.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솔선수범했으며, 모두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계몽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대여해 줌.
2. 고조의 1/15 세(稅)를 1/30 세(稅)로 바꿔 시행하고 농지와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여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킴.
3. 검약을 기본으로 삼고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검약을 강조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한 왕실이 가장 융성해짐.
② 경제(景帝)의 국치
1. 문제(文帝)가 제위 2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가 즉위함.
2. 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고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씀.
3. 노장사상인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경제는 전무한 발전을 이뤘고 사회 질서는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이룸.
8. 전한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무제의 대내정책
① 무제(武帝)의 즉위
1. 기원전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니, 이가 바로 무제이며 전한의 황금기를 이룩함.
2. 안정된 기반 위에 과감한 정치를 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듦.
② 대내정책
1. 중앙집권의 강화: 승상 전분이 임명을 맘대로 하자 조용히 타이르며 서서히 임명권을 확보함은 물론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킴.
2. 경제면에서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정부가 화폐를 구조하게 함.
3. 균수법(均輸法): 각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 대신 내어 장안 등지에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국가가 환수함. / 평준법(平準法): 물자가 많을 때는 보관을, 적을 때는 파는 형식으로 물가를 평균하여 정부의 수입을 증가시킴.
4.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五經博士)와 국학인 태학(太學), 그리고 유교 덕목에 의한 관리 등용제인 효렴제(孝廉制)를 개설함.
5. 동중서는 인간사회의 차별 질서가 하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며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함이 마땅하다고 함.
9. 무제의 대외정책과 선제의 선정
① 흉노와의 강경화 정책
1. 화친정책으로 일관해오던 흉노와의 관계를 강경책으로 전환함.
2. 장건(張騫)의 서역 여행은 서역 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철저하게 무찌르기 위한 것으로 2회에 걸쳐 파견됨.
3. 흉노에게 격파당한 월지(月氏)는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기에 한(漢)은 장건(張騫)을 써서 월지와 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무효가 됨.
② 장건의 13년 만의 귀국과 비단길 개척
1. 장건은 오는 길에도 흉노에 붙잡히게 되었으나 흉노의 내분을 틈타 도망함.
2. 13년 만에 한나라에 도착하여 장건의 복속에 따른 흉노족에 대한 기억 덕분에 흉노를 처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됨.
3. 이후 아시아 각국과 문물을 교류했고 비단길도 이때에 개척됨.
10. 사마천과 사기
① 사마담(司馬談)
1. 사마천의 아버지로, 무제(武帝)의 태사령(太史令)으로 비밀리에 행해지는 봉선(封禪)에 낄 줄 알았으나 자신은 끼지 못함.
2. 수행인원에까지 끼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며 죽던 중에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기가 저술하려던 책을 이어 완성해줄 것을 청하고 죽음.
②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책을 이어 저술하다
1. 어렸을 때 동중서와 공안국 밑에서 수학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체험을 한 것을 바탕으로 태사령(太史令)에 오르자마자 집필자료를 모음.
2. 시ㆍ서ㆍ춘추ㆍ전국책 등과 국중에 비장된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아버지의 책을 이어 집필하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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