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밖에 길이 있다
2016학년 1학기에는 3월부터 2주에 한 번씩 트래킹을 갔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학생은 “너무 야외활동을 자주 하는 거 아니예요?”라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 터널을 지날 때면 뭔가에 푹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우린 너무도 당연히 책상에 앉아서 하는 것만을 공부라 여기다
우린 제도권 학교가 아닌 비제도권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이렇게 야외활동을 하는 것 자체를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여 때론 귀찮게도 때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금도 제도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겐 수학여행이나 소풍, 체험활동이 잡히지 않고서는 야외로 나갈 수가 없다. 학교엔 커리큘럼이 있고 그에 따라 각 과목이 있으며, 그 과목별로 학습목표와 평가가 있기 때문에 매 시간이 바쁘니 말이다.
이쯤에서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참 무미건조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초등학생 저학년 때엔 학교에 갔다 오면 바로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일을 나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와 냉장고에서 콩나물, 깻잎김치 등을 빼서 밥을 간단하게 먹은 후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세를 들어 살던 집엔 부엌과 방이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안방이었고, 하나는 형과 내가 쓰는 방이었다. 그 방구석엔 주인집에서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아랫부분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한 사람이 충분히 누워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어서, 입구 쪽에 이불을 설치하여 빛을 차단한 후에 그 속에 들어가 놀곤 했다. 그러면 적당히 빛이 가려져 아늑한 기분이 들었고, 나만의 아지트인양 그냥 누워 있기도 했고 숙제도 조금 끼적이다가 스르르 잠이 오면 낮잠을 자기도 했다.
▲ 옛집이었으니 이렇게 상큼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에겐 안락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만끽하고 자유를 누리던 시간은 오래 가질 못했다. 고학년이 되면서 서당과 수학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느 학생과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건 중학교에 가서도 크게 바뀌지 않아 ‘학교→집→학원→집’의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중학교 때의 이미지는 어둑어둑한 하늘에 곧바로 비라도 내릴 듯한 이미지다.
그게 고등학교엔 더 심해져서 학교에서 하는 자율학습은 온갖 핍박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의 이미지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밤의 이미지다. 그나마 그 때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며 콧바람을 쐬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도 아니었으면 진즉에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칠 뻔했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이와 이미지가 비슷했다.
여러 가지의 공부가 있음에도, 오로지 하나의 공부만을 강요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6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학교도 그 때의 학교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한층 더 치열해졌고, 한층 더 무미건조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상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공부야’라는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이 순간에 이르고 보니, 공부란 단순히 교과서의 지식을 하나 더 암기하는 것, 시험 점수를 일점이라도 더 받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더라. 하나씩 알아가는 것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닌, 뭔가를 알아갈수록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공부였던 거다.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이 세상이 너무도 궁금하고, 알고 싶다’는 마음을 견지해가는 것이었다. 다산 선생도 그 당시의 세태에 대해 아래에 인용한 글과 같이 비판을 했었다.
예로부터 공부는 다섯 가지가 있다. 널리 배우는 것(博學)과 자세히 묻는 것(審問)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愼思)과 밝게 판별하는 것(明辯)과 독실하게 실행하는 것(篤行)이, 그것이다.
오늘날 공부는 단 한 가지, 박학일 뿐이다. 심문의 이하(심문, 신사, 명변, 독행)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한나라 학자의 학설이면 그 주요 줄거리도 묻지 않고 그 귀착하는 바도 살피지 않고 오직 전심으로 신봉한다. 가까이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바로잡는 것은 생각지 않고, 멀리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것은 구하지 않는다. 오직 널리 듣고 잘 기억하는 것(博聞强記)과 글 잘 짓고 말 잘하는 것(宏詞豪辨)을 자랑하며 세상을 고루하다고 깔볼 뿐이다.
古之爲學者五, 曰‘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今之爲學者一, 曰‘博學之而已’ 自審問而下, 非所意也. 凡漢儒之說, 不問其要領, 不察其歸趣, 唯專心志以信之. 邇之不慮乎治心而繕性; 遠之不求乎輔世而長民, 唯自眩其博聞強記宏詞豪辨, 以眇一世之陋而已. -丁若鏞, 『與猶堂全書』, 「五學論」 二
▲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을 하는 게 그 때도 꿈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박학의 공부만을 한다.
조선 후기에도 지금처럼 단순히 과거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 문장을 잘 지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위한 공부만이 중요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공부에만 매달리고, 심지어는 “공부는 오로지 박학을 위해서만 하는 거야”라고 외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해 다산 선생은 ‘박학’을 위한 공부는 하급바리 중에 하급바리이며, 제대로 된 공부는 심문, 신사, 명변, 독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공부를 하게 되면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바로잡는 것’과 ‘멀리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맞다, 지금 한국의 모든 문제는 소위 ‘전문가’라 이름 붙여진 사람들이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학식이 사회에 일정부분 도움을 주고,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겠지만, 오히려 그런 자만이, 오히려 그런 자부가 세상을 이다지도 더 경쟁의 피비린내가 풍기도록,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도록, ‘너를 밟고서라도 나만은 이겨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건 누가 뭐라 해도 가장 하급바리인 ‘박학의 공부’만을 하며 승승장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식의 스케일은 협소해졌고, 오로지 나 자신만 위하는, 소위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 성공을 위해 박학의 공부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예 하지 않고 뻐기는 사람도 있다.
트래킹으로 공부하자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는 그저 수많은 공부 중 하나의 공부일 뿐이고, ‘박학하는 공부’는 그저 여러 단계의 공부 중 하급바리의 공부일 뿐이다. 그걸 안다면, 과감히 거기서 탈피하여 다양한 공부를 해보는 것도, 박학 이상의 스케일을 키울 수 있는 공부를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가 ‘너무도 세상은 당연히 그래’라며 낭패감에 휩싸이고, ‘우리가 외친다한들 바뀌겠어’라며 절망감에 빠지는 상황에서 탈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생각할 때 단재학교에서 자꾸 외부활동을 하고, 야외활동을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꽉 짜인 현실에, 그래서 ‘학생이란 자고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만 해야 돼’라는 현실에 균열을 내고 다양한 공부를 해나가는 작지만 강한 도전이니 말이다. 우린 세상으로 나가고, 사람과 만나며 ‘자세히 물을 것이고, 신중히 생각할 것이며, 밝게 판별할 것이고, 독실하게 실행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2학기에도 어김없이 시작된 단재학교 트래킹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과연 우리가 마주친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고, 우리가 마주친 상황들은 어땠을까?
▲ 책 밖의 길을 찾는 청소년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로 속으로.
인용
1. 책 밖에 길이 있다
3. 없어진 것과 새로 생긴 것 중, 어느 게 알기 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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