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은거와 최후의 입절
1622년 유몽인은 64세 고령의 몸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남쪽 고흥땅에도 시골집이 있었는데, 굳이 금강산으로 향한 것을 보면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초탈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과 작별하면서 남긴 다음의 시에는 이러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神仙富貴兩難諧 | 신선과 부귀, 둘 다 지니기는 어렵나니 |
流水人間計較乖 | 흐르는 세월,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긋났지. |
金氣無端催歲暮 | 쌀쌀한 가을 기운 끊임없이 세모를 재촉하는데 |
白頭何事又天涯 | 흰머리로 무엇 하러 또 하늘가에 있는가? |
금강산 유점사에 거처를 정한 그는 심한 병을 앓으며 그 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 얼마간 기력을 회복하여 물외(物外)의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일가의 모두가 정권에서 축출되어 은거하고 있던 처지에서 경천동지의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현실을 완전히 초탈하여 생을 마칠 결심이었지만 가족들의 처지가 염려되었다. 그는 산을 나와 서울로 향하다가 철원의 보개사에 들렀다. 친분 있는 스님이 반정이 일어나 어수선한 시기에 왜 산에서 배회하느냐고 묻자, 유몽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늙고 노망든 사람이다. 지난번에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요, 지금 산을 떠난 것은 관직을 위함이 아니라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산에 머물게 된 것은 산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식량이 흔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오래되면 신(神)이 들리고, 사람이 늙으면 기운이 빠지는 법이다. 6년 전에 미리 화를 피한 것은 신이 들려서이고, 이익을 보고도 달려가지 않는 것은 기력이 쇠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선산(仙山)에 머물렀던 것은 고상한 이유에서였지만, 지금 야산(野山)에 든 것은 속된 이유에서다. 진흙탕에 뒹굴어도 더럽혀지지 않음은 결백함이요, 먹을 것이 있다고 이를 좋음은 비루함이다. 내가 어디에 처하리오? 아마도 재(才)와 부재(不才), 현(賢)과 불현(不賢), 지(智)와 우(愚), 귀(貴)와 천(賤)의 사이인가보다.
余老妄人也. 向之入山, 非輕世也, 樂山也; 今之去山, 非爲官也, 乏食也. 留此山者, 非愛山也, 穀賤也. 物久則神, 人老則耗. 避禍先六載, 神也; 見利不疾趨, 耗也. 前年處仙山, 高也; 今年投野山, 俗也. 泥而不滓, 潔也; 有食從之, 陋也. 吾何處之哉! 其惟才不才ㆍ賢不賢‧ㆍ智與愚ㆍ貴與賤之間乎. 「遊寶盖山贈靈隱寺彦機雲桂兩僧序」
자신은 노망든 늙은이니 세속의 가치 규준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서인 주도의 무력정변에 처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뇌하는 유몽인의 모습이 감지된다. 유몽인은 이날 밤 보개산에 머물며 「상부사(孀婦詞)」를 짓는바, 그 뜻은 늙은 과부가 개가 할 수 없는 이치에 빗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새 임금을 섬기며 벼슬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서울에 가 가족을 만나고 난 후 유몽인은 선산이 있는 양주 서산에 은거한다. 금강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혹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날까 하여 가족들을 배려한 처사로 보인다. 이러한 유몽인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끝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가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광해군 복위운동을 꾀한다는 무고가 발생한 것이다.
추국청에서 문초하는 대신들에게 유몽인은 다음의 시를 읊어 보이고는 이를 가지고 죄를 준다면 받겠다고 한다. 보개사에서 자신의 뜻을 정리하며 지은 「상부사(孀婦詞)」다.
七十老孀婦 端居守空壺 | 칠십 먹은 노과부 단정히 거처하며 빈방을 지키고 있나니, |
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 여사(女史)의 시를 익히 외웠고 임사(妊姒)의 가르침도 자못 알고 있다네. |
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 이웃 사람은 개가하길 권하며 잘생긴 얼굴 무궁화꽃 같다 하나, |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 하얗게 센머리에 화장을 한다면 어찌 연지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으리오? |
당시 그의 지조를 동정한 대신들 중 살려주자는 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민심의 이반을 염려한 반정 주역들의 결정에 따라 처형 당하고 만다. 두 번째 시화다. 그의 아들 약(瀹)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서자 사는 종적을 감추고 다섯 조카들은 모두 유배를 당한다.
1794년 방송 유화의 진정이 받아들여져 유몽인은 신원된다. 신원을 결정하고 하교하는 글에서 정조는 그를 김시습에 견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몽인은 갈라져서 싸우는 사악한 의론(인목대비 폐위론을 말함-인용자)을 돌아보고는 명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기꺼이 강호 사이에 자신을 내맡겼다. 시에 능하고 도를 깨달은 승려와 어울려 승려처럼 지냈으니, 이는 김시습이 속세를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는 청광(淸狂)한 본색을 보인 것과 같다. … 김시습과 유몽인 이 두 사람이 흠모한 것은 백이와 숙제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자취와 때에 따른 것일 뿐이다. 『정조실록』
유몽인은 김시습을 매우 흠모하여, ‘자신의 거취와 저술로 김시습의 뒤를 잇고자 한다 「留別天德菴法師法堅序」’고 드러내 말한 적이 있다. 역적의 오명을 쓰고 비명에 죽은 지 170여 년, 유몽인은 그제서야 참다운 지기를 만났다고 할 것이다.
지난 여름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유몽인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 입구에는 안내판 하나 없고 번듯한 길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 혼자서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전가평문화원장 신영범(愼英範) 선생의 안내로 묘소를 찾아 참배할 수 있었다. 묘소에 있는 문인석 한 구는 비바람에 쓰러져 있으며, 비석조차 놓여 있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팔십 노구에 지팡이를 짚고서 험한 비탈길을 오르며 필자를 안내하던 선생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이 자그마한 산문집이 유몽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인용
1. 네모난 마음을 지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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