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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산문선, 사람의 길을 걸은 정약용 - 1. 마재의 신혼부부들 본문

한문놀이터/인물

태학산문선, 사람의 길을 걸은 정약용 - 1. 마재의 신혼부부들

건방진방랑자 2020. 1. 1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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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길을 걸은 정약용

 

박무영

 

 

마재의 신혼부부들

 

벼르고 벼른 끝의 다산 생가 행이었다. 팔당댐과 다산 묘소로 갈라지는 갈림길, 뜻밖에 묘소 쪽으로 좌회전하는 차들이 많았다. ‘다산 묘소 들어가는 길목의 분위기 좋은 카페운운하는 여성지의 기사를 보았던 기억이 있는 터였다. 슬그머니 불안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기억 속의 마재[馬峴] 다산 생가는 찔레꽃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다. 처음 그곳을 찾던 날이 초여름 찔레꽃이 온통 희게 핀 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코끝에 스치는 웬 꿀 향기 怪有蜜香來觸鼻
흰 꽃이 눈 같은 찔레꽃 白花如雪野薔薇

 

이라고 마재의 여름을 읊었던 다산의 시구(夏日田園雜興 效范楊二家體 二十四首)와 맞아떨어져 생겨난 이미지였다. 양수리 물가의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가면, 강 굽이에 폭 싸여서 찔레꽃 향기가 짙던 적막할 만큼 고요하던 마을이었다. 19년의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이 손자를 어르기 위해 앵두를 따서 숨겨두기도 하고, 북한강 일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늙어 가던 곳이다. 평생 사랑한 아내 홍씨와 함께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전반, 200년 전의 그림자가 아직도 어렴풋이나마 끼쳐오는 듯하던 곳이었다.

 

주차장 팻말이 붙은 곳에 차를 멈춘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생가 주변은 먹고 자고 노는 집들로 한바탕 난전이 벌어져 있었다. 복원된 생가 건물 안에선 서너 쌍이나 되는 신혼부부들이 결혼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여유당(與猶堂)’ 정조의 급서와 함께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칩거한 다산이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사방 이웃들의 시선을 꺼리듯 겁을 내며[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그야말로 삼가고 또 삼가면서살겠다는 다짐을 담아지은 이름이었다. 그 여유당이 온통 촬영장 세트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쫓기듯 묘소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코끝을 간질이는 찔레 향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시달려 먼지가 뿌옇게 풀썩이기는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후손들의 천박한 문화(?)는 이 거인이 그토록 소망했던 고향 뒷산에서의 영면조차 난장을 만들어 버렸구나. 꿈조차 소란하겠다 싶었다.

 

사실 신혼부부들은 복원된 생가 뜰을 천박한 세트장으로 만들 일이 아니라, 옷깃을 여미고 묘소에 올라와 조촐한 맹세를 하는 것이 더 맞을 일이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 15세에 결혼해서 만60년을 내외로 살았다. 중간 20년 가까운 세월을 유배지에 떨어져 살았으나, 다산은 60년을 한결같이 성실한 남편이었다. 아내의 지기(知己)’를 자처한 따뜻한 남편이기도 했다.

 

 

 

 

이들의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다산이 유배되고 몇 년 후, 홍씨는 그녀가 시집오던 날 입었던 활옷의 다홍 치마를 보내왔다. 책장정이나 하라는 핑계였다. 몇십 년을 간직했던 옷감이니, 다홍색도 노랑색도 다 날아가고 희미한 노을빛만 남아 있었다. 유배가 장기화되면서 아들들은 드나들기도 했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갈 수 있었던 시절은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남편에게 그리움을 하소연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자신들의 혼례복이었던 이 빛 바랜 다홍치마를 받아든 다산은 잘 말라서 빈 공책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아들들에게 당부하는 교훈을 적어내려갔다. 그러고도 남은 치마감에는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를 그리고, 행복한 결혼을 기원하는 시를 적어서 시집간 외동딸에게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책과 그림에 깃들은 사연을 생각한다면 너희가 어떻게 이 책에 적힌 당부, 이 그림에 담긴 기원, 부모의 그 애절한 바람을 어길 수 있으랴.’ 남녀의 정갈한 결혼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는 듯하다. 차마 어떻게 어길 수 있으랴.

 

 

 

 

다산은 두 사람의 결혼 60주년 회혼일(回婚日)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回巹詩]였다.

 

육십 년 세월, 눈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니 六十風輪轉眼翻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穠桃春色似新婚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生離死別催人老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戚短歡長感主恩

 

그리고 지금까지, 둘은 한 무덤에 나란히 묻혀 있다.

 

부부가 되려는 사람들이라면, 사랑의 맹세에 이보다 더 좋은 곳, 더한 증인이 어디 있을까? 왜 우리는 광대처럼 차려 입고 연극 장면 같은 사진 촬영을 하고, 그리고는 부산하게 옷자락을 거머쥐고 이곳에서 떠나야 하는 문화 속에 사는 것일까?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 경세가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사실 다산의 업적은 이런 일반화로 다 포괄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고, 그것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깊이를 지닌다. 일반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다산은 당대의 첫 손가락에 꼽히던 시인이기도 했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시문집에는 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치열한 내용의 시와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너져 가는 봉건왕조 말기의 사회적 모순상을 피를 토하듯 고발하는 시들 현대의 어떤 리얼리즘 시인이 그 치열함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순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문장들이 갖는 지성의 깊이는 과연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유당전서의 시문집에는 이 위대한사람의 인간적 내면을 보여주는 시와 문장들도 함께 들어있어서, 이 글들을 읽다보면 이 위대한사람이 살갑게 느껴진다. 아내를 그리워한 한 사람의 지아비,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는 한 사람의 평범한 아비를 만나게 되고, 그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 방식이 따뜻하게 사무쳐온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나도 다산의 자식들 중의 하나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다소곳이 듣는 마음이 된다.

 

사실 너무 위대한 사람은 우리 범인으로서는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경원(敬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유당을 찾아와 결혼 사진을 찍으면서도, 다산과 홍씨가 함께 묻힌 묘소에 올라와 보지도 않고 걸음을 돌리는 우리의 문화는 아무래도 다산이 너무 위대한사람으로만 알려진 결과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따라서, 한 인간으로서의 다산의 모습을 찾아가 보는 것도 이런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인용

작가

1. 마재의 신혼부부들

2. 위대한 범부

3. 남을 돕고 세상을 건지려

4. 유배지에서의 고투

5. 둘째 형 정약전

6. 인생을 즐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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