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의 체험과 시화(詩禍)로 인한 파직
유몽인이 벼슬길에 들어선 지 3년만인 1592년, 동아시아의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유몽인은 연경에 사행을 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처지였다. 난중에 가족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중 왜구를 만나 셋째 형님은 왜구의 창칼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순절하고, 둘째 형님 또한 온 몸에 부상을 입고 겨우 살아나는 참변을 겪는다. 유몽인은 귀국하여 세자(광해군)를 모시고 전라·경상·충청의 삼도를 순무하고, 정유재란 때에는 함경도 순무어사·평안도 순무어사를 역임한다. 그의 나이 30대의 중후반을 전란의 현장 속에서 보낸 것이다. 이때 그는 국토의 대부분을 두루 다니며 백성의 참혹한 실정과 동요하는 민심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어우야담』에 있는 임진왜란에 관한 생생한 기록은 이러한 체험의 산물이니, 그 중 「홍도」나 「강남덕의 어머니」같은 작품에서는 미증유의 대전란에 처한 민중의 고난과 이를 극복하는 역정이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불교에 몸을 바친 이예순」 「재상가 서녀 진복의 일생」 같은 이야기에서는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소외된 여성의 일생이 진지하게 기록되어 있는바, 봉건지배질서가 동요하는 격변기 시대상의 일면이 여실히 포착되어 있다.
임란이 끝나자 유몽인은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후 선조 말년에 순탄한 벼슬길을 지낸다. 광해군 초반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낸 유몽인은 점차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당파의 속박에 얽매이게 되었고, 당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그는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어 둘러 묶은 끈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흡사 무언가 꽉 잡아맨 듯, 몸을 감고 조여오는데 스스로 풀 수가 없음은 유독 무엇 때문인가? 설사 누군가가 풀어주더라도 또 다른 이가 그것을 묶어 버린다. 푸는 사람과 묶는 사람이 서로 비슷한 적수라도 푸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맹분과 같은 장사가 묶어 놓은 것을 어린아이로 하여금 풀도록 하니, 푸는 이는 약하고 묶은 자는 강하다. 그렇다면 묶인 바를 푸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今有人於此, 非有徽纏之索, 而似有物縶縛之, 局局束束, 而不自解, 獨何耶? 設使張三解之, 而李四結之. 解與結相敵, 解之也不易, 又合賁育結之, 而嬰兒解之, 解者弱而結者强也, 解之也又難. 「解辨」
그의 정신적 압박에는 아랑곳없이 정국은 급속히 경색되어 갔다. 대북파는 정권을 전횡하기 위하여 광해군 9년 11월 인목대비 폐위론을 주창한다.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표명하라고 하자 유몽인은 이에 반대하고, 누차 사직 상소를 올린다. 이 무렵 그에게 첫 번째 시화(詩禍)가 발생하니,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광해군 10년 4월 어느날 유몽인은 친한 벗 이승형(李升亨)과 함께 남산에 올라 꽃구경을 하며 술을 마셨다. 봄날 꽃이 만발하였으며, 이승형의 기녀는 『시경』 「백주」 편을 노래하며 흥을 돋구어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취홍에 젖어 있을 때 추국청에 참여하여 옥사를 체결하라는 전갈이 이르고, 취흥을 망친 유몽인은 추국청에 도착해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滿城花柳擁春遊 | 도성에 가득찬 꽃과 버들 봄놀이 자리를 둘렀는데 |
玉手停盃唱柏舟 | 옥같이 고운 손 술잔을 놓고 「백주편(栢舟篇)」을 읊네. |
壯士忽持長劍走 | 장사가 문득 장검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
醉中當斫老奸頭 | 취한 김에 마땅히 간사한 놈의 머리를 찍으리. |
옥사를 국문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시를 지은 사실만으로도 문제가 될 것인데, 시의 내용 또한 단순치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위론에 반대하는 그를 축출하려 한 대북파에게는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백주’【『시경』에는 「백주」편이 「패풍(邶風)」과 「용풍(鄘風)」에 각각 실려 있는데, 두 편 모두 현실에 대한 불만을 노래한 것이다】와 ‘노간두(老奸頭)’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시 밝혀 죄를 주어야 할 것이라는 상소가 연이어졌다. 이에 유몽인은 ‘백주’는 자신이 읊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이승형의 기녀가 노래한 것이고, ‘노간두’란 옥사를 고변한 안처인(安處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명하였다(『광해군일기』참조).
그렇지만 이는 광해군의 엄한 견책에 따른 변명에 불과하지, 실상 이 시는 폐위론을 전개하며 정권을 독점하고자 한 대북파의 행태를 비판한 시로 보인다. 당시 당파간의 치열한 대립 속에 상대방을 허위 고발하는 옥사가 연이어졌던바, 유몽인은 이러한 행태에 대해 ‘밥숟가락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커 보이면 반드시 고변을 한다’(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1)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안처인의 고변은 후에 허위에 의한 무고임이 밝혀지나, 유몽인은 결국 이 때문에 파직된다.
훗날 정조는 유몽인의 신원을 결정하면서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시경』 「백주」 편을 상스럽고 비속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의 남록시(南麓詩)는 참으로 천고의 절조다. 그 음조는 원망을 하는 듯도 하고 애원을 하는 듯도 하며, 그 뜻은 흥(興)인 듯도 하고 비(比)인 듯도 하여 읽던 자가 책을 덮어 버리고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게 하니, 이 또한 유몽인의 생사간의 단말마적 절규다. 『정조실록』
이후 그는 서호(西湖, 지금의 마포·서강 일대)에 은거하며 관직에 대한 미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월사 이정구가 대제학으로 자신을 추천하자 ‘코풀덩어리에 불과한 떡을 두고 아이들과 다투지 않겠다[如與群兒爭鼻液之餠, 非所願也. 「奉月沙書」].’는 격렬한 언사로 이를 거절한 일도 있다. 유몽인의 『문집』 및 『어우야담』은 대략 이 시기에 정리된 것으로 여겨지며, 두보의 시를 평해한 『어우두평(於于杜評)』, 고인의 서법을 정리한 『필원법첩(筆苑法帖)』 등도 저술하였다 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인용
1. 네모난 마음을 지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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