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이야기: 위대한 범부
『여유당전서』에는 사람을 킬킬거리게 하는 시가 하나 숨어 있다. ‘11월 6일, 다산 동암(東菴) 청(淸齋)에서 혼자 자는데, 꿈에 한 미녀가 나타나 유혹하였다. 나도 마음이 동하였으나 이윽고 사양하여 보내면서 지어주었다[十一月六日 於茶山東庵淸齋獨宿 夢遇一姝來而嬉之 余亦情動 少頃辭而遣之 贈以絶句 覺猶了了]’는 시다.
눈 깊은 산 속 꽃 한 가지 | 雪山深處一枝花 |
어찌 붉은 집을 두른 복사꽃 같으랴 | 爭似緋桃護絳紗 |
이 마음 이미 금강 철이 되었으니 | 此心已作金剛鐵 |
설령 풍로를 가졌단들 “너를 어이할꼬” | 縱有風爐奈汝何 |
우리 시조 중에 뼈[骨], 풀무, 살[肉] 송곳으로 ‘녹여주고’ ‘뚫어보겠다’고 질펀한 육담을 늘어놓는 시조 한 쌍이 있다. 정철과 기녀 진옥이 주고받았다는 시조들이다. 이 시의 뒤쪽 두 구도 그런 유의 것이다. 40세의 장년에 유배길을 떠나 20년 가까이 홀아비 생활을 했던 다산이니, 프로이트를 들먹일 것도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들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위대한 사람의 이런 프라이버시를 건드리고 즐기는 것은 점잖지 못한 악취미일까?
그렇더라도, 무슨 자랑거리라고 문집에 버젓이 실어놓았을까? ‘내 저술이 흩어져 버리고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느냐’며 신경을 곤두세우던 다산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일표이서(一表二書)【『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어 사회개혁의 방법을 모색했던 경세 가, 호한한 동양철학적 저술을 남긴 철학자, 거중기를 설계, 제작하였던 과학자, 『마과회통(麻科會通)』의 저자, 그리고 「애절양(哀絶陽)」의 시인인 위대한 다산의 인간적 진면목이다. 다산의 위대함은 이런 범부로서의 면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의 시를 둘러싼 에피소드에는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을 다산도 당연히 겪었을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에피소드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산의 태도를 보여준다. 다산은 조선조를 지배했던 성리학이 인간에 대해 지녔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를 인간에 대해 갖는다. 다산은 인간이 육체적, 본능적 존재라는 것에 대해 위선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던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에 대해 혐오하는 위선적 태도는 갖지 않았다. 앞의 꿈속에서 지었다는 시도 성리학적 관점이라면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이 끼어들지 못하도록[尊天理遏人慾]’ 자신을 지키는 것에 실패한 것이므로 부끄럽게 여겨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산은 다소 자랑스런 어조로 굳이 기록해 두었으며, ‘나도 마음이 동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렇다고 다산이 정철 식의 파탈한 유흥 같은 것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도 아니었다. 정철이 진옥과 주고받았다는 시조는 다 벗어던지고 노는 기생방의 풍류에 자신을 거리낌없이 던질 줄 아는 풍류객의 것이다. 그러나 다산에게서는 그처럼 자신을 벗어 던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산은 본능적 욕구는 인간적인 것이나 그것을 승화해나가는 과정에 진실로 ‘인간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선 매우 철저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음이 동했으나 사양하고 보낸 점’이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생과의 화답시는 지을망정 아내를 시의 소재로 등장시키지는 않았던 사대부의 풍습에 아랑곳없이 아내가 그리운 한 지아비의 심정을 절실하게 토로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산은 성리적 도학자나 풍류객 정철 어느 쪽도 달리 아무래도 ‘범부’의 혐의가 짙은 사람이다. 다산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어서, 웬만한 경우에는 정합성이 구축되지 않는, 생활과 철학, 문학과 철학, 문학이론 전체에 걸쳐 철저한 일관성을 추구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산의 이런 범부로서의 모습은 그냥 우연히 ‘그도 사람이었으므로 범부의 모습도 지녔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산은 철저히 ‘사람’으로서 ‘사람의 길’을 완성시켜가려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범부(凡夫)다. 위대한 범부다.
인용
1. 마재의 신혼부부들
2. 위대한 범부
4. 유배지에서의 고투
5. 둘째 형 정약전
6. 인생을 즐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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