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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산문선, 사람의 길을 걸은 정약용 - 5. 둘째 형 정약전 본문

한문놀이터/인물

태학산문선, 사람의 길을 걸은 정약용 - 5. 둘째 형 정약전

건방진방랑자 2020. 1. 1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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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이야기: 둘째 형 정약전

 

다산을 생각하면 그림자처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둘째 형 정약전이다. 이 두 사람은 삶의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걸어서, 다산에게는 언제나 형의 그림자가 있다.

 

다산은 외증조인 공재 윤두서(尹斗緖)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지금 남아있는 공재의 자화상을 보면, 단정하고 정돈된 모습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후에 그려진 다산의 초상에는 공재의 풍만한 볼에 비해 비교적 마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에 비해 약전은 무성한 수염에 풍채가 좋아 장비 같았다고 한다. 정조가 두 형제를 두고 형의 씩씩한 모습이 아우의 아름다운 모습보다 낫다고 했다고 하니, 좀 더 남성적인 용모의 형과 깔끔한 외모의 동생이었나 보다.

 

모습만큼 성격도 달랐다. 다산은 형님은 덕성이 깊고 통이 크며 학식도 깊어 나하고는 비교가 안되지만, 부지런하고 민첩한 것은 나보다 못하다고 했다. 반면, 정약전은 내 아우는 도량이 좁은 것이 유일한 흠이라고 했다고 한다. 호탕하고 통이 큰 호남형의 형과 깐깐하고 명석한 아우였을 이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산사에서의 독서에서부터 마지막 유배길까지 함께 나섰고, 유배지에서도 편지를 오가며 학문을 토론했던 평생의 지기였다. 어찌 보면 정약전의 생애는 다산이란 천재의 그늘에 가린 그림자 같은 측면이 있다. 벼슬길에 나선 것 자체도 늦었지만, 선망의 대상이었던 초계문신(抄啟文臣)에 피선되었을 적에도, 아우가 형 보다 먼저 선출되어 선임의 자리에 있으니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하여 취소된 일이 있다. 벼슬살이도 초입부터 다산을 목표로 하는 간접 공격의 대상이 되어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 호방하고 너그러운 형은 깐깐하고 명석한 막내아우를 끝없이 받아주었고 학문적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다산의 경학적 저술들은 지어질 때마다 약전에게 보내져서 토론을 거쳤다. 그리하여 다산의 경설(經說)에는 정약전의 의견들이 혼입되었다. 심지어 정약전이 지은 자산역속(玆山易束)은 정약전의 작으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유당전서에 편입되어 전한다. 다산은 나보다 부지런하지 못해서 저술이 많이 없었다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약전은 다산이라는 천재의 그림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이 위대한 막내 동생에게 진심으로 경복하는 형이기도 했다. 다산에게는 참으로 복된 형이었다. 이 형의 부고에 다산은 통곡했다. ‘경서에 관한 설 240책을 새로 장정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불살라 버리고 말아야 할 것이냐?’

 

 

 

 

두 사람의 사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정약전은 일찌감치 세상에의 뜻을 접은 사람으로 행세했다. 둘이 함께 벼슬살이하던 서울 시절, 약전은 친구들과 어울려 날마다 술을 마시고 떠들며 못하는 장난이 없이 취해 돌아다녔다. 봉건제도가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18세기 후반, 시답잖은 세상살이 한껏 비웃으며 한 세상 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현실적인 개혁 가능성을 믿었다. 다산은 자주 형의 단정치 못한 처세를 책망했고, 정약전은 잔소리를 해대는 아우를 슬그머니 그들의 모임에서 제외시키고 끼워주지 않았다고 한다.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들 형제 평생의 질곡이었던 천주교 신봉 문제에 대해서도, 다산은 심장을 쪼개보고 구곡간장을 더듬어 보아도 일호의 잔재도 없다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천주교 문제로 인한 화를 피해보려 했다. 그러나 정약전은 굳이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아우였던 정약종(丁若鍾)에 대한 형으로서의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이 다산의 설명이다. ‘화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골육이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에 부끄럼이 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정약종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전도 회장으로, 일가 다섯 명이 모두 순교하였다. 집안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동생이었으나, 동생과 조카들을 부정하면서까지 굳이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정약전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정약전은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다.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묘지명에는 복암이 천한 이웃집 노파의 병 수발을 하느라고 몸소 젖은 부엌에 들어가 죽을 쑤는 광경을 정약전이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약전은 이 일은 정말로 사람을 심복하게 한다고 두고두고 되뇌었다고 한다. 호방한 성격의 정약전이 가진 인간적인 덕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품성이 유배지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호송하던 군관을 울며 이별하게 만든 정약전의 인품이었을 것이다.

 

정약전의 이런 인품과 도량, 호탕한 기질들은 다산의 도량이 좁은 것이 유일한 흠인인간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산은 미치광이처럼 지내는 정약전의 술친구들을 못마땅해 했지만, 정약전은 너는 모 상서(某尙書), 모 시랑(某侍郞)과 좋아지내고 나는 술꾼 몇 사람과 이처럼 미친 듯 지내지만 화가 닥치면 어느 쪽이 배반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유년에 화가 일어나자 이 무리 몇 사람이 평소처럼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고 하며 다산은 탄식했다. “, 이 점이 바로 내가 형님께 못 미치는 점이다라고 현실적인 성취에 끝내 매달리는 이 아우에게 세상에서 한발 물러난 듯이 처세했던 형의 태도는 여유와 관용을 주었지 않을까?

 

다산 사상의 핵심적인 한 특성은 인간의 평등에 대한 관념이다. ‘길 가는 사람들을 고관대작들을 대하듯 하고, 천민들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는 것이 경()의 지극함이라든지, ‘사람이 벗과 금슬과 서적을 대하여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스레 하기란 쉬운 일이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걸인, 비천한 자, 어리석은 자를 대하여서도 공경하는 빛을 잃지 않고 예의로 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런 표현들은 바로 다산이 지은 정약전의 묘지명에 쓰인 것이기도 하다. 인간 평등을 이야기하는 다산의 휴머니즘에 정약전의 인품이 미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산은 완벽주의자의 결벽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점은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선을 끝없이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몰라서사회생활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다산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다.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현지의 여자를 소실로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과 16년이라는 유배기간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다산은 그보다 더 길었던 유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분별이 있다는 것[夫婦有別]은 각자가 그 짝을 배필로 삼고 서로 남의 배필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아들들에게 써보낸 사람이었다. 가혹할 만큼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 철저한 성미는 간혹 곁의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을 몹시 사랑해서 후사로 삼고 싶어 했던 계부의 청을 예법에 어긋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숙부를 상심케 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 일이 있었다. 정약전의 외아들 학초가 요절하자 학초의 후사를 세우고 싶어하는 형수에게 예법을 들어 반대함으로써 집안에 잠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다산의 이런 기질들은 중형 약전과의 어울림으로 여유와 포용력을 얻어갔을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형보다 부지런하고 민첩하다고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등 저서를 몇 권 남기기는 했으나, 끝내 흑산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다산은 끝까지 살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약전보다 유배지의 조건이 좋았던 탓이기도 했으나, 살아남겠다는 의지도 치열했다.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들개를 잡아먹고서라도 몸을 보전해 오래 살아 버틸 궁리를 하라는 충언과 함께 개고기 요리법을 상세히 써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 돌아와 5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완성하고 75세의 수를 누렸다.

 

그는 한결같이 근실한 사람이었다. ‘현실 참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에도 열혈과 울분을 다스리고 거기에 방향을 주어 결실을 맺도록 끝없이 자신을 단속하며 사람의 길을 완성시켜 간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간적 약점까지도 넘어서게 했다. 물론 거기엔 둘째 형 약전의 그림자가 같이 있다.

 

누가 옳았을까? 혈육을 부정하면서까지 굳이 삶에 매달리지 않는 태도를 택한 사람이 옳았을까?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을 증명하고, 형 약전의 일도 후세가 알 수 있도록 기록해 두었던 부지런한 동생이 옳았을까?

 

휘장 넘어서 왁자하니 웃는 소리 哄堂大噱隔簾帷
세상에도 우스운 일 있음이 틀림없지 定有人間絶倒奇
천천히 일어나 무슨 일인가 물으니 徐起呼兒問委折
아무 일도 아니고 그저 웃었을 뿐이라네 但云無事偶相嬉

 

만년에 고향 초천에서 지은, 뒷방 늙은이가 된 듯한 소외감을 읊은 너무 늙었음을 자조하는[耄甚自嘲]’ 시다. 하지만 그것은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받는 상이었다.

 

 

 

 

인용

작가

1. 마재의 신혼부부들

2. 위대한 범부

3. 남을 돕고 세상을 건지려

4. 유배지에서의 고투

5. 둘째 형 정약전

6. 인생을 즐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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