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이야기: 인생을 즐긴다는 것
양수리 지나 운길산 산마루, 하늘 가까이 종처럼 걸려있는 수종사(水鐘寺)에서는 북한강 일대가 다 굽어보인다. 이 작은 암자는 어린 다산이 책 상자를 메고 오르내리며 독서하던 절이다. 그는 훗날 경의로 진사가 되고 나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금의환향하는 길에 이 절에 들르기도 한다. 다산으로선 아마 가장 티 없는 시절이었을 것이다.
다산이 형 약전에게 잔소리를 해대었으므로, 자신들의 모임에서 제외시켜버리고 끼워주지 않았다는 서울 시절은 다산의 전성기였다. 당시 서울은 지방과는 문화적 차이가 현격한, 말하자면 그때도 ‘특별시’였다. 이 ‘특별한 도시’ 서울의 사족층 사이에는 세련된 도시 취향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하나가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 감상하고, 희귀한 꽃과 나무, 괴석을 수집해 뜰을 장식하는 취미다. 다산 역시 귀한 꽃과 나무들을 수집해 화분에 심고 이 화분들로 뜨락 안에 조그만 원림을 조성하고 대나무 난 간을 둘러두고서 고상한 분위기를 즐겼다. 1796년 무렵 다산은 고 관들의 집이 많았던 명례방에 살았는데, 오가는 수레바퀴 소리, 말 울음소리로 하도 번잡해서 이런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요즘 세상으로 말한다면, 서울 아파트촌에 사는 사람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조성하는 정원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는 화분으로 이루어진 이 정원을 죽이라고 불렀다. 이 죽란에서는 다산의 가까운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곤 했는데, 나중엔 정식으로 ‘죽란시사’가 된다.
죽란시사의 규약을 보고 있으면 이 시절 다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피면 한 번 모이며, 한여름 과일이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지에서 연꽃 구경으로 한 번 모이고, 국화에 꽃이 피면 한 번 모이며, 겨울에 큰 눈이 오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에 심어진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아들을 낳으면 그가 한 턱 내고,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그가 내고, 승진하면 그가 내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그가 낸다.
조촐하지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다. 다산은 매우 근실하고 명민한 사람이었지만, 예민한 시인의 감각도 갖춘 드문 자질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결코 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누추한 삶에도 도처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산은 양계를 시작했다는 작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써 보낸 편지에서 양계는 생업으로서 훌륭한 일이지만, 독서한 사람은 생업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써보냈다. 독서한 사람은 양계라는 생업의 결과를 연구와 연결시켜 민생에 도움이 될 양계법의 저술로 이어낼 수 있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관조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시정(詩情)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고 타이른다.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것도 다산이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였다. 그것이 생존의 차원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는 ‘문화’의 기본요소였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다산의 이런 언급을 민망해하거나 은근히 못마땅해하고, 서울에 집중하는 인구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정책 입안자들이 들으면 질색할 일이지만, 다산은 사람은 모름지기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다산에게 ‘서울’이란 바로 ‘문화’였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활이 문명화되어 있는 중국과 달리 조선은 서울 도성 문 밖으로 몇 리만 나가도 벌써 원시시대에 가까우니 되도록 서울에서 살도록 하라고 권유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여기서’의 삶을 완성의 경지로 나아가게 하려는 그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생활을 생존의 차원에서 생활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문화다. 백성의 상황이 생존도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했지만, 다산의 생각에 인간다운 삶이란 문화의 관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화의 관념에 기본이 되는 것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추구할 줄 아는 감수성이다.
문화만 그러하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 ‘불의’나 ‘비참’에 대해 분노하고 눈물 흘릴 수 있을까? 유배지 강진(康津)의 다산은 중풍으로 마비된 몸을 이끌고 학문에 전념하며, 한 편으론 피를 토하듯 백성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유배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 대해 맑은 서정을 담은 시를 쓰고 산문들을 지어낸다. 그는 유배지에서 한결 가까이 보게 된 백성들의 누추한 삶에도 깃들인 아름다움을 유쾌한 어조로 잡아낼 줄 아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것은 백성에 대한 뜨거운 애정, 중세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개혁적 사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추구하는 섬세 한 감수성이 없다면, 그의 사회시들이 갖는 ‘삼엄한 아름다움’이 가능했을까? 서울 사환시절 다산의 산문들에선 바로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보게 된다.
다산은 참말 위대한 사람이었다. 당파의 시절에 다른 당의 사람의 입에서 조선 근세의 단 한 사람, 중국에 내놓아도 밑질 것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뱉게 했던 사람이다. 천문, 지리, 의학, 과학, 철학,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호한한 저작의 범위, 그 가운데 드러나는 투철한 지성, 역사의 향방을 가늠하고 끌어가는 안목, 그리고 끝없는 열정은 참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그러나 위대한 다산의 이면에 있는 ‘범부’의 모습은 그 위대함에 인간적 색채를 준다. 그가 ‘초인’이 아니라 ‘사람의 길’을 성실하게 완성하는 길을 가고자 했던 범부라는 사실이 그의 위대함에 덧붙여질 때야 다산은 비로소 다산이 된다.
마찬가지로 다산의 논설문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치열한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문예적으로도 정연한 논리에 간결하고 힘찬 문장은 당당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명문들이다. 그러나 이 논설문들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허전하다. 이 당당하고 정연한 글들 곁에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서정적 성격의 글들이 함께 있을 때야 비로소 다산의 산문 작품은 전모를 갖추게 된다. 그래야 다산이 ‘우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는 서정적 성격의 산문들을 주로 뽑았다. 그러다 보니 주로 다산 생애의 전반기 사환시절의 문장들과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 주가 되었다. 그것은 다산의 논설문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제에서도 다산의 인간적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다산의 또 다른 면을 독자가 발견하고 좀 더 인간적으로 다산을 가깝게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용
1. 마재의 신혼부부들
2. 위대한 범부
4. 유배지에서의 고투
5. 둘째 형 정약전
6. 인생을 즐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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