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이야기: 유배지에서의 고투
다산 연보에는 다산의 임종장면이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날(1836년 2월 22일) 진시(辰時)에 큰바람이 땅을 쓸며 불고 햇빛이 엷어져 어둑어둑해지며 누렇게 토우(흙비)의 기운이 끼었다. 문인 이강회(李綱會)가 서울에 있었는데, 큰 집이 무너져내려 누르는 꿈을 꾸었다.
다산의 부고가 전해지자, 홍길주(洪吉周)는 ‘열수(冽水, 다산의 다른 호)가 죽었구나! 수만 권 서고가 무너졌구나!’라고 탄식했다. 500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긴 거인의 죽음을 묘사한 언급들이다.
그러나 정작 장엄한 것은 이 거인의 죽음이 아니다. 이 거인이 5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저술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장엄하다.
다산은 젊은 시절, 국왕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날아오르던 ‘장래 재상감’이었다. 정조는 그를 드러내놓고 자랑하였고, 비호하였다. 조선조 사회의 개혁을 꿈꾸던 이 학자 군주와 의기투합하여서 자신이 믿는 바 개혁을 실현하리라는 포부에 차 있던, 그것이 보장되어 있는 듯이 보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인생의 정점에서 일시에 겨우 죽음을 면한 사학죄인의 신세로 추락해버린 것이 다산이었다. 유배지인 강진에 처음 도착하자 아무도 상대하려 하지 않고 울타리를 헐어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를 불쌍히 여긴 읍내 주막의 할멈이 방 한 칸을 내주어 겨우 기거를 시작했다고 했다. 음력으로 11월이었으니, 주막 방에 틀어박혀 듣는 강진만의 바다 바람 소리가 얼마나 ‘칼’바람이었을까? 좌절의 나락에 떨어진 순간에 그는 외친다. ‘나는 이제야 독서할 시간을 얻었구나, 축복이다[眞得讀書時矣]’ 다산의 저작들은 대부분 유배기에 저술되었거나,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초고가 마련된 것들이다. 그의 저작들은 유배 초기에는 극도의 경제적 곤란과 외로움 속에,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찾았던 유배 후반기에는 육체적으로 무너져 가는 고통 속에서 작성된 것이다. 중풍으로 수족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눈조차 잘 보이지 않는 지경에서 제자들에게, 때로는 근친 와 있는 아들들에게 구술하여 받아쓰게 하면서 이루어진 저술들인 것이다. 그 무렵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중형 약전(若銓)에 게 쓴 편지에서는
중풍이 골수에 들어 입가에는 언제나 침이 흐르고 왼편 다리는 늘 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고향 두미협에서, 얼음 위에서 잉어 낚시를 하는 늙은이들이 쓰던 모자 생각나십니까? 항상 그 솜 모자를 머리에 쓰고 지내야 하는 지경입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혀도 굳어서 말도 엇갈리곤 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도 ‘최근에는 악학(樂學)에 전념하고 있다’면서 ‘기력은 이미 쇠약한데 이런 대적을 만났으니, 아마 접전을 치러 낼 도리가 없을 듯 싶습니다’라고 걱정한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은 중풍으로 쓰러져 경전에 관한 의혹을 다 파헤치리라던 마음도 점점 없어지지만, 정신과 기력이 조금 회복되면 또 다시 여러 가지 궁리가 불쑥 일어나곤 한다’고 고백하였다.
현실적 개혁에의 의지가 실현의 길을 봉쇄당하자, 저술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완성시켜 남겨 놓으려는 불굴의 열정으로 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개혁의 방안을 구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것의 철학적 기반까지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여유당전서』 500권이다. 이 『여유당전서』의 집필 과정에는 주어진 조건에 굴하지 않는 인간정신의 위대함 ―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怨天尤人]’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인간정신이 보여주는 장엄함이 있다. 절로 외경의 마음을 품게 한다.
다산의 중형 정약전(丁若銓)은 다산의 저술을 읽고서 ‘그의 정치적 좌절이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으나 세상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과연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나 같은 보통사람들에겐 이 저술행위의 장엄함 뒤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동기들이 좀 더 살갑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너희들이 학문을 해서 내가 남긴 글들을 읽고 정리해서 간행해 주지 않는다면 내 평생의 저술들은 다 흩어져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재판기록과 반대파들의 상소문으로만 나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겠느냐?
라고 호소한다. 다산의 저술은 개인으로서는 처절한 사투였다.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은 내용적으로는 정치적 숙청을 겸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해온 노론 일파가 정조의 통치 아래 남인들에게 나누어주게 되었던 권력을 회수하는 기회로 삼은 사건이었다. ‘장래 재상감’으로 정조의 비호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다산은 중요한 표적 중의 하나였다. 젊은 시절 한 때 천주교에 심취해 영세교인으로 행세한 일이 있던 다산을 반대파들은 사학죄인으로 몰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19년이란 유례 없이 긴 기간을 유배지에 금고해 두었다. 다산만이 아니라 다산 일가, 남인의 주요세력들이 모조리 사학죄인의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의 저술은 한갓 억울한 정치적 희생자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는 오기였을 것이다. 후세를 향해 누가 더 완성된 사람인지를 심판 받자는 것이다. 그리고 방대한 학문적 저술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후세를 향해 증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당파의 시절에 다른 당의 사람으로 하여금 조선 근세의 단 한 사람, 중국에 내놓아도 밑질 것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뱉게 했던 것이다. 다산의 저술이 이루어지던 이런 광경들을 듣고 있노라면,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짓던 마음이 생각난다. 분노와 좌절의 열정을 저술에의 에너지로 전환시켜간 놀라운 의지 이면에 있는 처절한 슬픔을 감지하게 된다.
이 슬픔의 한편엔 자신으로 인해 사람 행세를 하며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아들들에 대한 쓰라린 회한이 있다. 첫 유배지인 장기에 도착해서 아들들에게 쓴 첫 편지에서 다산은 말한다.
내가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어버리기 위해 서만이 아니다.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 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서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
젊은 시인으로서 이미 식자간에 촉망을 모으고 있던 큰아들 학연은 젊은 마음에 가졌을, 세상을 향한 야망을 펼치기는커녕 폐족의 처지로 전락했다. 둘째 아들도 세상에서 버젓이 행세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상해주랴? 너희들을 내가 어찌해야 할까?’ ― 자신과 함께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 아들들에 대한 아비로서의 끝없는 회한이 그의 저작의 또 다른 동력이었다. ‘하다 못해 학문적으로 훌륭한 아버지를 가졌다는 이름이라도 물려주련다. 그리하여 나중에 손자 대에라도 다시 세상에서 행세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마, 정 안되면 후세에라도 사학 죄인의 자식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면하게 해주마,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하는 한 아비의 고심참담한 마음이 그의 저술에 깔려 있는 것이다.
자식 둔 부모라면 어찌 이 마음을 모르랴. 이런 고백은 그가 초인(超人)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알게 한다. 한 평범한 인간, 한 평범한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 가장 인간적인 동기가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낳기도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산은 고향에 남겨놓고 온 자식들에 대한 교육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편지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교육을 계속한다. 이런 아버지 다산의 마음이 아버지 다산을 넘어서서, 『여유당전서』라는 불후의 저작들을 낳기에 이른 것이다.
인용
1. 마재의 신혼부부들
2. 위대한 범부
4. 유배지에서의 고투
5. 둘째 형 정약전
6. 인생을 즐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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