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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빛은 거울 같았네 - 3-1. 총평 본문

책/한문(漢文)

강물빛은 거울 같았네 - 3-1. 총평

건방진방랑자 2020. 4. 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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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총평

 

 

1

이 글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고 그런 연후에 다시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등 굴곡과 변전變轉이 심한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연암은 의도적으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을 마주 세우고 있으며, 이 마주 세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글에서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 더 나아가 현재에 대해 발언하는 하나의 미적 방식이 되고 있다.

연암은 묘지명의 상투적인 형식이나 일반적인 격식을 무시하고 마음의 행로에 따라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이 글은 형식적으로는 아주 파격적이되, 내용적으로는 더없이 진실하고 감동적인 글이 될 수 있었다.

 

 

2

이 글은 연암의 누이에 대한 글이고, 삽입된 에피소드도 연암과 누이 두 사람만의 내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왜일까? 우선, 글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의 철없던 유년시절의 행복감이나 철들면서 겪게 되는 세상의 온갖 신고辛苦, 그리고 죽음이라는 이 세 가지 패턴은 단지 연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3

이 글에서의 이별은 강가에서의 이별이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말했듯 강가에서의 이별만큼 슬픈 것은 없다. 이 글에서 그 점이 언표言表되고 있지는 않지만 연암은 그 점을 십분 의식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생각된다. 연암 스스로도 이 글을 득의작得意作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훗날 중국에 갈 때 연암은 중국 문인들에게 보여줄 자신의 글로 이 글을 챙겨갔다.

 

 

4

연암의 처남이자 둘도 없는 지기였고, 동시에 높은 비평가적 안목을 지녀 곧잘 연암의 글을 비평해주곤 했던 이재성李在誠(1751~1809)은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을 따르면 지극한 예가 되고, 정황을 묘사하면 참된 글이 되는 법이거늘, 글에 어찌 정해진 법도가 있겠는가. 이 작품은 고인古人(옛사람)의 글인 양 읽으면 의당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이 없겠는데, 금인今人(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 까닭에 의혹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 상자에 감춰두기 바란다.

緣情爲至禮, 寫境爲眞文. 文何甞有定法哉? 此篇以古人之文讀之, 則當無異辭, 而以今人之文讀之, 故不能無疑. 願秘之巾衍.

 

 

요컨대 이재성은 큰누님 박씨 묘지명이 인간 본연의 정을 잘 드러내고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한 훌륭한 글이라 보았다. 그런데 고인이니 금인이니 한 말은 무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조선의 문단은 고문古文을 숭상하는 문인들이 여전히 주류의 위치에 있었지만 한편으로 금문今文을 숭상하는 문인들도 없지 않았다. ‘고문이란 일종의 전통주의로서, 당송팔대가 등 과거에 이미 확립된 문장의 법도를 전범으로 삼는 창작 태도를 가리킨다. ‘금문이란, 다른 말로는 시문時文이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반전통주의로서, 고문의 법도에 구애됨이 없이 진솔하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창작 태도를 가리킨다. 이재성의 말 중 고인의 글이란 곧 고문을, “금인의 글이란 곧 금문을 가리킨다. 고문이든 금문이든 모두 중국에서 제기된 창작 방법론인데, 그것이 목하 조선 땅에 들어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문이 주류고 금문이 비주류였던지라 금문을 쓰는 사람들은 종종 비난을 받곤 하였다.

연암은 대략 30세 이후 창작방법을 둘러싼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것이 저 유명한 법고창신론法古創新論’, 옛을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명제다. 연암은 일방적으로 고문만 추수追隨할 경우 격식에 빠져 창조력을 잃기 쉽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금문만 추구할 경우 경망스럽게 되거나 고전적 깊이를 결여하게 되기 쉽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 둘을 지양하여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바, 그것이 곧 법고창신론이다. 연암이 제창한 이 법고창신론은 중국까지 포함한 당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히 최고 수준의 문예이론이었다.

연암이 35세 때 쓴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연암의 이런 사고가 한창 무르익은 단계의 문장이다. 그렇기는 하나, 보수적인 전통주의자, 다시 말해 고지식하게도 고문밖에 모르는 사람 눈에는 연암의 이 글이 영락없는 금문으로 비쳤을 터이고, 그래서 이재성은 상자에 감춰두기 바란다(願秘之巾衍)”라고 말했을 것이다.

 

 

5

연암의 문하생인 이덕무李德懋는 이 글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정을 표현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진실되고 절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선생(연암)의 시를 읽고서 눈물을 흘린 적이 두 번이었다. 처음은 선생께서 그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를 접했을 때다. 나는 이 시를 읽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또 이런 평도 남겼다.

 

 

이 글은 채 3백 자도 안 되지만, 진정眞情을 토로해 문득 수천 글자나 되는 문장의 기세를 보이니, 마치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16살에 시집간 누이가 고생만 하다 43살에 죽다

2. 누이 시집가던 날의 추억과 아련히 겹치는 현재

3. 묘지명의 관습을 깨어 생명력과 감동을 얻다

3-1. 총평

4. 미묘한 감정을 글과 시로 풀어내는 마술사

5. 시간에 따라 변하는 내 모습과 같은 연암의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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