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도 되지 않은 연암이 소일하는 방법
답남수(答南壽)
남수(南壽)란 박남수(朴南壽 : 1758~1787)를 말한다. 그는 자가 산여(山如)로, 진사 급제 후 대과에는 누차 낙방하여 불우하게 지냈다. 연암의 증조인 박태두(朴泰斗) 이후 갈라진 동족간으로, 연암의 족손(族孫)이 된다. 박남수는 남공철(南公轍)과 절친한 사이였다.
박지원(朴趾源)
雨雨三晝, 可憐弼雲繁杏, 銷作紅泥. 若早知如此, 豈嫌招邀作一日消閒耶?
永日悄坐, 獨弄雙陸, 右手爲甲, 左手爲乙, 而呼五呼百之際, 猶有物我之間, 勝負關心, 翻成對頭.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焉歟.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而吾於彼, 亦可謂造物者, 猶不勝私, 扶抑如此. 昨日之雨, 杏雖衰落, 桃則夭好. 吾又未知, 彼大造物者, 扶桃抑杏, 亦有所私於彼者歟.
忽見簾榜, 語燕喃喃, 所謂誨汝知之, 知之爲知之, 不覺失笑曰: “汝好讀書, 然不有博奕者乎, 猶賢乎已.” 吾年未四十, 已白頭, 其神情意態, 已如老人. 燕客譆笑, 此老人消遣訣也.
此際淸翰忽墜, 足慰我思. 而紫帖柔毫, 甚似文谷, 雅則有之, 風骨全乏. 此龍谷尹尙書雖爲搢紳楷範, 終非大家法意也, 不可不知.
「靜存窩記」, 今承來索, 始乃省覺, 平生然諾向人易, 已遭此迫隘, 殊令悔赧然. 今旣省存, 謹當靜構, 而第其遲速, 有未可料. 不宣. 『燕巖集』 卷之十
▲ 신윤복 그림 「쌍륙: 쌍륙삼매(雙六三昧)」
한량으로 보이는 선비들이 기생들과 쌍륙놀이에 빠져 있다. 쌍륙놀이란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두 편이 15개씩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던져나온 숫자의 합만큼 말을 움직여서 자신의 모든 말을 판 밖으로 내보내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조선시대 때 특히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 식민지 시기에 화투에 밀려 사라졌다고 한다.
해석
雨雨三晝, 可憐弼雲繁杏,
비가 사흘 간 계속되니 가련하게도 필운동의 활짝 폈던 살구꽃이
銷作紅泥.
흩어져 붉은색 진흙이 되었구려.
若早知如此,
만약 일찍이 이와 같을 줄 알았더라도
豈嫌招邀作一日消閒耶?
어찌 초대하여 하루의 소일거리로 삼는 걸 싫어하는가?
永日悄坐, 獨弄雙陸,
긴 해에 고요하게 앉아 홀로 쌍륙놀이 하는데
右手爲甲, 左手爲乙,
오른손을 갑으로 삼고 왼손을 을로 삼아
而呼五呼百之際, 猶有物我之間,
‘다섯이오’, ‘여섯이오’라고 소리칠 때에도 오히려 사물과 나는 간격이 있어
勝負關心, 翻成對頭.
승부에 관심을 둬 서로 마주 보고 겨루려는 마음이 번번히 생기더군요.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焉歟.
저는 알지 못하겠지만 저는 저의 양손에 대해 또한 애착이 있는 손이 있는 것이겠죠.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저 양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누어지니 사물이라 할 수 있겠고
而吾於彼, 亦可謂造物者,
나는 두 손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할 만한데
猶不勝私, 扶抑如此.
오히려 사사로운 마음 이길 길 없어 한 손을 편들어 북돋고 한 손을 억누름이 이와 같습니다.
昨日之雨, 杏雖衰落,
어제 비에 살구꽃은 비록 쇠락하여 떨어졌지만
桃則夭好.
곧 필 복사꽃은 막 피어 아름답구려.
吾又未知, 彼大造物者,
나는 또한 알지 못하겠지만 저 조물주는
扶桃抑杏, 亦有所私於彼者歟.
복사꽃을 북돋고 살구꽃을 억눌렀으니 또한 애착하는 게 있는 것이겠죠.
忽見簾榜, 語燕喃喃,
갑자기 발을 보니 제비 재잘거리는데
所謂誨汝知之, 知之爲知之, 不覺失笑曰:
‘회여지지, 지지위지지’라 하기에 나도 몰래 실소하며 말했죠.
“汝好讀書, 然不有博奕者乎, 猶賢乎已.”
“네가 독서를 좋아한다는데 장기나 바둑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만두는 것보단 나으리.”
내 나이 마흔도 안 됐는데 이미 흰 머리가 나서
其神情意態, 已如老人.
정신상태와 모습이 이미 노인과 같네.
燕客譆笑, 此老人消遣訣也.
제비 나그네가 희희덕거리며 즐기니 이것이 노인이 소일하는 비결이지.
此際淸翰忽墜, 足慰我思.
이즈음에 그대의 맑은 편지가 갑자기 와서 나의 생각을 위로해주기 충분하네.
而紫帖柔毫, 甚似文谷,
자주빛 편지지의 부드러운 필치는 매우 문곡【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호이다. 김수항은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전서(篆書)와 해서(楷書)ㆍ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다고 한다.】과 흡사하여
雅則有之, 風骨全乏.
우아함은 있다 해도 풍채와 골격은 전혀 없네.
此龍谷尹尙書雖爲搢紳楷範,
이것은 용곡의 상서 윤급(尹汲)【윤 상서(尹尙書) : 판서를 지낸 윤급(尹汲 : 1697~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용기 있게 반대하여 자주 파직ㆍ좌천되었으므로 직신(直臣)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필법이 정려(精麗)하여 당시 이름난 고관 대신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으며,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여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불렀다고 한다. 『槿域書畵徵』】이 비록 진신들의 모범은 된다 해도
終非大家法意也, 不可不知.
끝내 대가들의 본받을 만한 뜻은 아니 알지 않을 수 없다네.
「靜存窩記」, 今承來索, 始乃省覺,
「정존와기」는 이제 보내온 편지에서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비로소 살피며 깨달았으니
平生然諾向人易, 已遭此迫隘,
평소에 남에게 허락을 쉽게 하여 이미 이러한 긴박하고도 힘든 상황을 겪게 되었으니
殊令悔赧然.
매우 후회되고 무안해졌네.
今旣省存, 謹當靜構,
이제 이미 반성하며 생각해뒀으니 삼가 마땅히 고요히 구성해보겠지만
而第其遲速, 有未可料. 不宣. 『燕巖集』 卷之十
다만 속도를 예측할 순 없다네. 할 말은 많지만 더 펴진 않겠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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