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서를 꼭꼭 감싸두려 하지 말게
그런 그가 하루는 자신이 그동안 모은 고금의 인장을 찍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가지고 와서 연암에게 서문을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끝부분에 가서 공자의 인용과,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을 경계한다고 운운한 대목이 평지돌출격으로 나오면서 글이 끝나고 있어 문맥을 소연히 잡기가 어렵다.
인용된 공자의 말뜻은 이렇다. 예전에는 사관이 사서를 편찬하면서, 뜻이 분명치 않아서 쓰지 못하고 남겨둔 사료를 공자 자신도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을 사관은 왜 남겨 두었던가? 자신은 분명히 알 수 없어도 혹 훗날에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 없애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또 말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제 말을 빌려주어 그것을 타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순후한 풍습을 볼 수가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들도 알아서는 안 되겠기에, 그런 사료는 남김없이 없애버린다. 내 아끼는 말을 남이 타도록 빌려주는 것도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세상인심은 날로 야박해지고, 인정은 나날이 각박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암은 왜 이 말을 「유씨도서보서」 말미에다 썼을까? 또 책을 빌려주지 않는 자에게 깊은 경계로 삼는다는 말 뜻은 무엇일까? 아마도 연옥은 제 집의 장서를 남에게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무슨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간 모은 온갖 희귀한 인장을 찍은 인보를 가지고와서 서문을 청하니 연암은 그만 기분이 상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연암은 일찍이 이덕무에게서 그가 도장을 파서 책마다 장서인을 찍어두면 자손 대대로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을 거라던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연암은 유련이 그저 도장을 새겨 소장한 책마다 찍어, 남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자기 자손에게만 길이길이 전하려 하는 그런 욕심을 나무랐다. 지식이란 공변된 것이니 서로 돌려보아 숨통이 트이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어디로 흩어질까 염려하여 도장까지 손수 파서 찍어두고, 남에게는 보여주지도 않다가 이제와 서문을 부탁하노라며 슬며시 인보집을 내놓는 것이 얄미웠던 것이다.
▲ 전문
인용
- 『논어』 「衛靈公」에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오히려 史官이 분명치 않은 것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과, 말 가진 이가 말을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런 일도 없어졌구나!’라고 하셨다. 子曰 :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당시의 야박해진 인정을 탄식한 내용이다. [본문으로]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에 새긴 이름 - 5. 돌에 새겨봐야 부질없는 것을 (0) | 2020.04.04 |
---|---|
돌에 새긴 이름 - 4. 장서를 남기고 싶거든 친구들에게 빌려주게 (0) | 2020.04.04 |
돌에 새긴 이름 - 2. 천자의 옥새로도 만리장성으로도 지켜지지 않네 (0) | 2020.04.04 |
돌에 새긴 이름 - 1. 장서마다 도장을 찍어 자손에게 물려주다 (0) | 2020.04.04 |
지황탕地黃湯 위의 거품 - 6.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0) | 2020.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