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양이 아닌 정신을 그리다
한편으로 「불이당기」는 이렇게 읽고 말 글은 아니다. 앞서도 보았듯 심사와 형사에 얽힌 화론畵論의 핵심처를 정면에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 즉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의 정신이 붓에 앞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논의는 위부인衛夫人의 「필진도筆陣圖」에서 처음 언급한 이래로 역대 화론에서 늘상 거론되어 온 말이다. 그림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사생寫生이 아니라 사심寫心일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진욱陳郁은 『장일화유藏一話腴』에서 “대개 형상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가 않고, 오직 마음을 그려내기가 어려울 뿐이다. 대저 굴원의 모습을 그려 꼭 같게 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그 못가를 거닐며 읊조리고 충성을 품어 불평한 뜻을 능히 그려내지 못한다면 또한 굴원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껍데기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실질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매화시에 정작 어울리는 것은 핍진한 묵매도가 아닌 것이며, 시들지 않는 잣나무는 오히려 「설부」의 고졸한 글씨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송나라 때 화가 이공린李公麟(1049-1106)은 일찍이 두보의 「박계행縛鷄行」을 소재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가 어떻게 형사形似 아닌 심사心似로써 사심寫心의 경계에 도달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먼저 그 시를 읽어 보기로 하자.
小奴縛鷄向市賣 |
작은 종놈 닭을 묶어 저자로 팔러 가니 |
鷄被縛急相喧爭 |
묶인 닭들 다급해 시끄럽게 다투누나. |
家中厭鷄食蟲蟻 |
집에선 벌레 개미 물리도록 먹겠지만 |
不知鷄賣還遭烹 |
팔려가면 도리어 삶아질 줄 어찌 아나. |
蟲鷄於人何厚薄 |
벌레와 닭 내게 있어 어찌 후박厚薄 있으랴만 |
吾叱奴人解其縛 |
종놈을 꾸짖고서 묶은 것을 풀어주네. |
鷄蟲得失無了時 |
닭과 벌레 득과 실은 그칠 때가 없으리니 |
注目寒江倚山閣 |
찬 강물 바라보며 산 누각에 기대노라. |
옹색한 살림에 닭이라도 저자에 내다 팔까 싶어 꽁꽁 묶었다. 그러자 묶인 닭들이 안 죽겠다고 푸드득 난리를 친다. 저것들이 팔려 가면 나는 몇 끼 밥을 먹겠지만 저놈들은 또 삶아져 남의 밥상 위에 오를 것이 아닌가? 저것도 목숨이라고 살아 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꼴이 꼭 내 처지를 보는 것 같아서 그만 풀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시를 이공린은 어떻게 그려냈을까? 꽁꽁 묶인 닭들의 푸드득 대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모습을 그렸을까? 그렇지 않다. 이공린은 그림 속에 결코 닭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것은 8구, 추운 강물을 바라보며 산 누각에 기대선 두보의 스산한 표정뿐이었다. ‘한강寒江’이라 했으니, 혹독한 겨울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 가난을 이고서 또 한 겨울을 어찌 견딘단 말인가? 만감이 교차하는 그의 표정 속에 이미 「박계행」의 사연이 다 담겨져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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