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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눈 속의 잣나무,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본문

책/한문(漢文)

눈 속의 잣나무,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건방진방랑자 2020. 3. 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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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다시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 살며 죽원옹이라 호를 지은 사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이른바 저 문동文同이 말한 흉중성죽胸中成竹의 화론을 점화點化한 것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이랬거니, 대나무를 그리려면 반드시 가슴 속에 대나무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판교板橋 정섭鄭燮은 자신이 그린 대나무 그림의 제발題跋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맑은 가을 강가 여관에서 새벽에 일어나 대나무를 보니, 안개 빛과 해 그림자와 이슬 기운이 모두 성근 가지와 빽빽한 잎새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가슴 속에서 뭉게뭉게 그림을 그리고픈 생각이 솟아났다. 기실 가슴 속의 대나무는 눈 앞의 대나무는 아니었다. 인하여 먹을 갈고 종이를 펼쳐 붓을 놀려 순식간에 변상變相을 지어내니, 손 안의 대나무는 또한 가슴 속의 대나무가 아니었다. 요컨대 뜻이 붓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 법칙이라면, 정취가 법도의 밖에 있다는 것은 조화의 기미인 것이니, 유독 그림만 그렇겠는가?

江館淸秋, 晨起看竹, 烟光日影露氣, 皆浮動於疎枝密葉之間. 胸中勃勃, 遂有畵意. 其實胸中之竹, 竝不是眼中之竹也. 因而磨墨展紙, 落筆倏作變相. 手中之竹, 又不是胸中之竹也. 總之, 意在筆先者, 定則也, 趣在法外者, 化機也, 獨畵云乎哉?

 

 

맑은 가을날 새벽 강가에 앉아 대숲을 본다. 자욱한 안개빛과 떠오르는 해 그림자, 그리고 촉촉한 이슬 기운이 대나무 가지와 잎새 사이에 떠돌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화가는 강렬한 화의畵意를 느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든 화가의 마음속에 담긴 대나무는 눈 앞에 서 있는 대나무와는 같지가 않다. 붓을 재빨리 휘둘러 순식간에 그려 놓고 보니, 종이 위의 대나무는 또 가슴 속에 있던 대나무가 아니었다. 눈앞의 대나무와 그려진 대나무, 그리고 애초에 내 가슴 속에 있던 대나무는 서로 다르다. 대상을 사생하기에 앞서 화의畵意가 충만해야 하는 것은 그림에 있어 정칙定則이 된다. 그러나 막상 가슴 속 형상이 눈앞의 실상과 만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그러한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의 기미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어찌 그림만 그러하랴? 시 쓰는 일도 다를 바가 없다. 무심한 일상 속에서 문득 사물이 내게로 다가온다. 무엇을 쓰겠다는 의도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내면 속에서 꿈틀대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소중히 포태胞胎하여 가다듬어 언어로 빚어낸다. 그렇게 한편의 시가 완성되면, 언어는 내 가슴 속에 맺혔던 애초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저 혼자 살아 숨 쉬는 사물이 된다. 이미 그것은 내가 만났던 실제의 사물도 아닌 것이다.

시인은 가슴 속에 대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눈 속에서 잣나무를 보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 앞의 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투명한 시선으로 가슴을 열어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해무리 달무리로 아롱진다. 이런 설레임, 이런 두근거림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이규상李奎象(1727-1799)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이양천의 다음 시구가 실려 있다.

 

鳴泉浸草流螢化

우는 샘물 풀에 스며 반딧불로 화하고

積雨蒸菌古樹香

장마비에 버섯 돋아 고목은 향기롭네.

 

 

돌돌돌 울며 흐르던 샘물은 길섶의 풀을 적신다. 젖은 풀은 다시 반짝반짝 반딧불이로 변화하였다. 지루한 장마 끝에 고목엔 버섯이 돋아나, 바짝 말라있던 둥치에 아연 향기가 감돈다. 썩은 풀이 변하여 반디가 되고, 고목枯木이 버섯을 쪄서 향기를 머금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주론적 순환이 이 속에 담겨 있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대나무도 없는 집인데 죽원옹이란 호를 짓다

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3. 위급한 위리안치 중에도 임금을 걱정한 이양천의 절개

4.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보면 눈 속 잣나무가 보인다

5. 모양이 아닌 정신을 그리다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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