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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눈 속의 잣나무,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 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본문

책/한문(漢文)

눈 속의 잣나무,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 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0. 3. 3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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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그러자 학사는 이렇게 말했었네.

까닭이 있다네. 내가 예전에 이인상李麟祥과 노닐었는데, 일찍이 비단 한폭을 보내 제갈공명 사당의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었지. 이인상은 한참 있다가 전서로 설부雪賦를 써서는 돌려보냈더군. 내가 전서를 얻고는 또 기뻐서 더욱 그 그림을 재촉했더니, 이인상은 웃으면서 말했지. 자네 아직 몰랐던가? 예전에 이미 보냈던걸?내가 놀라서 말했네. 지난 번 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였을 뿐일세. 자네가 어찌 그것을 잊었단 말인가?이인상은 웃으며 말했지. 잣나무는 그 가운데 있다네. 대저 바람서리가 모질다 보니 능히 변치 않을 것이 있겠는가? 자네 잣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구해보게.내가 그제서야 웃으며 대답하였네. 그림을 구했건만 전서를 써주고, 눈을 보면서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라니, 잣나무와는 거리가 머네 그려. 자네의 도란 것이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 ‘有之矣. 吾初與李元靈遊, 嘗遣絹一本, 請畵孔明廟柏. 元靈良久, 以古篆書雪賦以還. 吾得篆且喜, 益促其畵, 元靈笑曰: 子未喩耶? 昔已往矣.余驚曰: 昔者來, 乃篆書雪賦耳. 子豈忘之耶?元靈笑曰: 柏在其中矣. 夫風霜刻厲, 而其有能不變者耶? 子欲見柏, 則求之於雪矣.余乃笑應曰: 求畵而爲篆, 見雪而思不變, 則於柏遠矣. 子之爲道也, 不已離乎?

자네 그 까닭을 알고 싶은가? 그게 다 이유가 있다네.”

이어지는 대목부터는 글 속의 액자로 들어간 이양천과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화이다. 이인상도 영조조의 유명한 화가로 그의 자는 원령元靈이고, 호는 능호관凌壺觀으로 알려진 이다. 한번은 이양천이 이인상에게 비단 한 폭을 보내 그림을 그려내란 적이 있었다. 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에 나오는, ‘승상의 사당을 어데가 찾으리오. 금관성 밖 잣나무 빽빽한 곳이로다. 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한 바로 그 제갈공명 사당 앞의 잣나무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얼마 후에 이인상은 고졸한 전서체로 사혜련謝惠連설부雪賦를 써서 보내왔다. 이양천은 기뻐하며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림은 언제 그려줄 텐가?”

지난번에 보냈지 않은가?”

보내다니? 아니 지난번에 보내준 것은 설부였지 않나? 내가 원한 것은 제갈공명 사당 앞의 잣나무였단 말일세.”

어허, 이 사람. 그걸 몰랐단 말인가? 자네의 잣나무는 이미 그 설부가운데 있단 말이야. ! 날씨가 추워져서 바람서리가 모질고 보니 온갖 초목들은 다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그 모진 추위 속에서도 능히 그 푸르름을 변치 않는 것은 오직 잣나무가 있을 뿐일세. 자네 잣나무를 보고 싶은가? 그러면 그 눈 속에서 찾아보게나.”

이거 내가 완전히 한 방 먹었군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그림인데 자네는 정작 글씨를 써주고, 내가 그려달란 것은 잣나무였는데, 자네는 눈만 그려주면서 그 속에서 잣나무를 찾아보라 하네 그려. 날더러 자네의 전서 글씨 속에 숨어 있는 잣나무를 보라는 말이군 그래. 자네가 말하는 그림의 도리란 것이 너무도 황당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 일전은 이양천의 KO패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나중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이것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뒷날 추사가 그린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도 다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해온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잣나무는 사시장철 푸르렀다. 그러나 여름에는 다른 초목들도 죄 푸르고 보니, 잣나무의 푸르름이 돋보일 것이 없었다. 막상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겨울이 와서 온갖 초목이 시들게 되자 잣나무의 오롯한 절개가 새삼스레 우러러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말하다 죄를 얻어, 흑산도 가운데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었네. 일찍이 하루 낮 하루 밤에 7백리를 내달리는데, 길에서 전하는 말이 금부도사가 장차 이르러 후명後命 즉 사약을 내리는 명령이 있을 거라는 게야. 하인들은 온통 놀라 떨며 울어댔지. 그때 날씨는 추운데 눈은 내리고, 앙상한 나무와 허물어진 벼랑은 들죽날쭉 무너져 길을 막아 아무리 바라보아도 가이 없었다네. 그런데 바위 앞의 늙은 나무가 거꾸러져서도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마치 마른 대나무와 같지 뭔가. 내가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고 멀리 가리키며 기이함을 일컫고는, 이 어찌 이인상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었네.

旣而, 余言事得罪, 圍籬黑山島中, 嘗一日一夜, 疾馳七百里, 道路傳言, 金吾郞且至, 有後命. 僮僕驚怖啼泣. 時天寒雨雪, 其落木崩崖, 嵯砑虧蔽, 一望無垠. 而岩前老樹倒垂枝, 若枯竹. 余方立馬披蓑, 遙指稱奇曰: ‘此豈元靈古篆樹耶?’

이후 이양천은 상소문을 올린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려 멀리 흑산도로 위리안치 된다. “귀양 내려오는 길이었네. 밤낮 없이 말을 달려 하루 7백리 길을 내달렸었지. 오는 동안 내내 곧 금부도사가 들이닥쳐 사약을 내릴 것이란 소문이 흉흉하게 뒤따라 왔다네. 따라온 하인 녀석은 울며불며 벌벌 떨지, 날씨는 추운데 눈은 펑펑 내리지, 앙상한 나무와 무너진 벼랑은 자꾸만 길을 막아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아도 끝간 데를 모르겠더군. 그런데 말이야. 바위 앞에 늙은 나무가 거꾸러진 채로 제 가지를 아래로 드리웠는데, 그것이 내 눈에는 꼭 마른 대나무 같지 뭔가. 그제서야 나는 옛날 이인상의 그림 생각이 퍼뜩 났네. 눈보라 속에 가지를 드리운 늙은 나무 가지가 어째서 내 눈엔 마른 대나무로 보였을까? 그때 나는 퍼뜩 이인상이 내게 전서로 써준 잣나무가 바로 이런 경계가 아닐까 싶었다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대나무도 없는 집인데 죽원옹이란 호를 짓다

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3. 위급한 위리안치 중에도 임금을 걱정한 이양천의 절개

4.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보면 눈 속 잣나무가 보인다

5. 모양이 아닌 정신을 그리다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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