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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 12. 형수님 묘지명 본문

책/한문(漢文)

연암을 읽는다 - 12. 형수님 묘지명

건방진방랑자 2020. 3. 3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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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각주:1] [각주:2] [각주:3]는 완산完山[각주:4] 이동필李東馝[각주:5]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각주:6]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각주:7] 박희원朴喜源[각주:8]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각주:9]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각주:10]께서는 매양 한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각주:11]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 청빈淸貧이 뼈에 사무쳤으니, 별세할 때 집안에는 돈이 몇 푼 없었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秩. 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 淸寒入骨, 捐舘之日, 家乏無十金之產.

이 글은 박지원의 형수 묘지명이다. 묘지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서 큰누님 박씨 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을 검토할 때 언급한 바 있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는다. 연암에게는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셨고, 이 형님 아래로 두 분의 누님이 계셨다. 즉 연암은 4남매 중 막내였다. 형님은 연암보다 열다섯 살 위였으며, 형수 이씨는 연암보다 열세 살 위였다. 형수 이씨가 시집왔을 때 연암은 고작 세 살 난 어린애였다. 연암은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의 제문을 쓴 바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아아, (연암)가 세 살 적에

처음 말을 해

이니 능금이니 말 배울 때

오천이란 말도 뇌까렸죠.

무얼 자랑한 거냐구요?

새색시의 집이었죠.

(이동필)께서 따님을 보러 오실 땐

늘 흰 나귀를 타고 왔죠.

눈은 깊고 수염은 길어

몹시 점잖아 보이셨지요.

달려 나가 인사한 후

기뻐서 글공부도 안하고는

덩달아 장인이라 부르며

형님을 따라 했었지요.

꼭 어제 아침 일 같은데

30여 년이 흘렀군요.

공은 성품이 굳세고 밝아

세상 사정 깊이 알고

옛날 일에 밝고 예를 좋아해

도덕이 갖추어지고 대의가 분명했지요.

평생 벼슬하지 아니하고

처사로 지냈어도

하늘의 명 원망 않고

생전에 후회가 없었지요.

아아, 나의 어머니를 닮아

형수(이동필의 딸)를 어머니처럼 대했지요.

형수는 집안에서

옛날의 충신과 같았지요.

온 힘을 다해 그만두지 않았으니

공은 꼭 자기 몸이 아픈 것처럼

늘 걱정하고 근심했죠.

옛날 제후국이

이웃 나라를 돕고 백성을 보살피듯

수시로 양식을 보내주어

갓난아이 돌보듯 했지요.

 

 

이동필은 그 딸보다 6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이 제문은 그가 죽은 해인 1772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제문에는 형수의 묘지명에 보이지 않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 연암이 형수를 어머니처럼 여겼다는 것, 그리고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이 가난한 집안에 시집 가 고생하는 딸을 늘 걱정하며 수시로 도와주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1. 공인恭人: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5품 관리의 아내에게 내리던 작호爵號이다. 연암의 형 박희원은 평생 벼슬한 적이 없지만, 그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냈기에 박희원의 처가 죽자 나라에서 이런 작호를 내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본문으로]
  2. 휘諱: 고인의 이름을 뜻한다. 예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피하다’ ‘숨기다’는 뜻을 갖는 ‘휘’라는 말을 ‘이름’이라는 뜻으로 썼다. [본문으로]
  3. 모某: ‘아무개’라는 뜻이다. 남자의 묘지명에는 ‘휘’ 다음에 이름을 적지만 여자의 묘지명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모’라고만 썼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 글쓰기에서 여자는 늘 ‘익명’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그 성에 ‘씨’자가 붙어 김씨니 박씨니 하고 불리든지, 서씨의 아내, 유씨의 아내라는 뜻인 서처, 유처로 불리든지, 난설헌이나 윤지당이니 하는 당호堂號로 불리든지, 수원댁이니 이진사댁이니 하는 택호宅號로 불릴 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이런 문화를 낳았다. 연암도 자기 시대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지라 이런 관습에 따라 글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4. 완산完山: 전주의 옛 이름으로, 박지원의 형수인 이씨의 본관이다. [본문으로]
  5. 이동필李東馝(1704~1772): 이씨의 아버지다. 호는 초은樵隱 혹은 오천梧川이며, 평생 포의로 지냈다. [본문으로]
  6. 덕양군德陽君(1524~1581): 중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본문으로]
  7. 반남潘南: 연암의 본관으로, 예전의 반남현潘南縣(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8. 박희원朴喜源(1722~1787): 연암의 형이다. [본문으로]
  9. 희원의 할아버지: 장간공章簡公(‘장간’은 시호) 박필균朴弼均(1685~1760)을 말한다.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大司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본문으로]
  10. 선왕先王: 영조英祖(1694~1776)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1. 탁무卓茂: 한漢나라 때 인물로 백성들을 잘 다스린 유능한 관리였지만 왕망이 집권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광무제光武帝는 탁무의 재능과 지조를 높이 사 그를 태부太傅 벼슬에 임명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4년 7월 24일 조條에 보면, “임금이 동돈녕同敦寧 박필균을 불러 보시고는 그 연로함을 슬퍼하신 후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시며 후한의 탁무 고사를 들어 그를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임명하셨다”라는 말이 보인다. [본문으로]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지만 형수님은 힘써 가족 열명의 생계를 꾸려 나갔으며,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大家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양 낙엽이 지고 추워지는 가을이면 형수님은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 병이 더욱 도졌다. 이렇게 몇 년을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마침내 금상今上[각주:1] 2년인 무술년戊戌年(1778) 725일에 운명하셨다.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 且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疾益發, 綿延數歲, 竟以上之二年戊戌七月廿五日歿.

한편,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도 연암의 형수에 대한 언급이 두 군데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당신의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기셨다. 친척과 친구들은 이런 아버지를 저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북송의 학자)이 그 형 백강伯康을 섬긴 데 견주었다. 형수 이공인李恭人은 하도 가난을 많이 겪은지라 몸이 대단히 수척했으며 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과 좋은 말로써 그 마음을 위로해드렸다. 매양 무얼 얻으면 그것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당신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형수께 공손히 바쳤다.(120)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每有所得, 雖甚微細, 必不入私室, 敬納於嫂氏.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젊을 때 쓰고 남은 돈 스무 냥이 있었더니라. 네 어머니의 의복이 해진 것을 생각하고 그 돈을 보자기에 싸서 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형님(연암의 형수)은 늘 가난하고 쪼들리십니다. 이 돈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내가 그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구나.”

큰어머니는 성품이 현숙했으며, 시동생인 어린 우리 아버지를 길러주셨다. 그래서 큰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우애가 깊었다. 큰어머니는 오랫동안 가난을 겪은 탓으로 만년에 결핵을 앓아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 기침을 하며 괴로움을 참지 못하곤 했다. (146)

先君嘗言: “吾少時, 嘗有用餘錢二千, 念淑人衣具缺用, 齎衣襆以遺之. 淑人言: ‘伯嫂中饋常艱乏, 何乃以此入私室乎?’ 吾時甚慚其言, 至今不能忘也.”

伯母性度賢淑, 養育先君. 先妣友愛篤至. 而久經貧困, 晚來病在痰火, 言語之間, 或有不能忍煩者.

 

 

이 인용문을 통해서도 연암이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인용문은 형수 이씨가 만년에 결핵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마도 집안을 꾸려 나가기 위해 불철주야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 제대로 못 먹고 쉬지 못해 이런 병에 걸린 것이리라. 그리고 이 인용문 중에 때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였다(有時躁鬱不能遣)”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씨는 당시 너무 벅찬 생활고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1. 금상今上: 이 글을 쓴 시점의 임금은 정조正祖(1752~1800)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 단락은 먼저 이씨의 가계家系를 밝힌 다음,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온 일과 아이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은 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20년을 뼈 빠지게 일을 하다 결국 병고 속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씨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이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 명문가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왜 그리 가난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연암은 이 단락의 중간부분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바, 청빈淸貧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어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았음 물론, 직위를 이용해 재산을 늘리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녹봉만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명문가 사대부라고 해서 다 연암의 할아버지 같았던 건 아니다. 서울의 대갓집 가운데에는 그 직위를 이용해 사익을 챙기거나 집안의 청지기나 노비를 동원해 이런저런 상업 활동을 꾀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고지식하게 녹봉만으로 생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암의 아버지와 연암의 형은 평생 벼슬하지 못했고, 연암 자신도 형수가 세상을 뜰 때까지 말단 벼슬 하나 얻어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진 지방 사족士族과 달리 서울과 근기近畿 지역의 사족은 2대쯤 벼슬이 떨어지면 몹시 곤궁해지게 마련이며, 몰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연암 당대에 와서 연암의 집안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연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에 다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歲且荐喪), 그 장례비용이 집안의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연암 집안은 대대로 청빈을 강조하던 집안이었다. 당시의 청빈을 사대부가의 큰 미덕으로 간주하던 시대였으니 사대부들은 대개들 짐짓 청빈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다 청빈한 것은 아니었으며 가식과 위선으로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연암 집안의 경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점과 관련해선 과정록의 다음 기록을 참조할 만하다.

 

 

아버지(연암)는 일찍이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

그리고는 집안에 전해오는 옛일들을 다음과 같이 낱낱이 들어 말씀해주셨다. (134-1)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조부께서는 그 지위가 공경의 반열이었으나 자주 끼닛거리가 떨어져 가난한 선비의 살림살이와 다를 바 없으셨다. 도성 서쪽의 낡은 집은 누추하고 비좁았으나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으셨다. 한번은 집에 심하게 무너진 곳이 있어 객이 수리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조부께서 지방수령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이 되어서 집을 수리하는 건 옳지 않다.’

얼마 후 통진(지금의 김포군 통진면)에 있는 농장의 방죽이 해일로 무너져 다시 쌓으려 했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마침 그때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관찰사가 되어서 자기 농장을 돌보는 건 옳지 않다.’

조부께서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그 일을 중지시켰다. 객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관찰사나 수령이 되려는 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데 공은 도리어 손해만 보고 있다.’

이 일이 알려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는 청렴결백한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 집의 법도는 당시로서도 너무 지나치다고 일컬어졌다. (134-5)

王父位躋列卿, 而屢空如寒士. 城西弊廬樸陋逼窄, 平生不易居. 嘗有頽圮甚處, 客請修葺之, 適除外任. 王父謂: ‘作守令而修室屋, 不可也.’已之. 通津薄田, 海溢堰缺, 方築之, 適拜畿伯. 又謂: ‘作道伯而治農庄, 不可也.’

送人停其役. 客恨之曰: ‘爲方伯守宰, 將以撥貧也, 如公家則反有害焉.’ 傳以爲笑.

其時士大夫, 亦多廉白立家, 而吾家規模, 在當時亦以太過稱之.

 

(중략)

 

무릇 이런 사실들은 모두 자손들이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집안은 수십 대에 걸쳐 청빈함과 검소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원래 타고난 것이었다. 내 비록 너희들이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부귀와 안인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바라는 건 사대부 집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凡此皆子孫之所不可不知. 吾家歷數十世, 淸素如此, 此殆天之所畀付者耳.

吾雖望爾曹衣煖食飽, 富樂安逸必不可得, 但願大家不絕讀書種子耳.”

 

 

이에서 보듯 연암 집안은 대대로 청빈을 강조하는 가풍을 이어 왔고, 연암 스스로도 이런 가풍에 긍지를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정록의 이 대목을 통해 이 단락 중의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라고 한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함평 이씨가 죽음으로써 맏며느리인 공인 이씨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인 이씨가 주부가 된 것은 그녀의 고난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주부로서 두 해 동안 연달아 초상을 치러야 했다. 예전의 초상은 지금처럼 병원 영안실에 3일간 빈소를 마련한 후 곧바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복잡한 상례喪禮에 따라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상은 삼년상이다. 게다가 공인 이씨는 주부의 위치에 있었으니 이것저것 챙기고 신경 쓸 일과 해야 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인 이씨는 이 두 초상을 치르면서 몸이 더욱 더 상하게 되었을 게 틀림없다.

 

이 단락에는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당시 사대부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 즉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집에 친지나 일가친척이 자주 찾아왔다. 한번 찾아오면 짧으면 며칠, 길면 보름이나 달포씩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때 밥을 잘 지어 대접해야 함은 물론, 그 옷까지 빨아주어야 했다. 그리고 떠날 때는 얼마간의 노잣돈을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사대부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에 적어도 열 몇 번 정도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제수祭需 비용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의 경우 접빈객 봉제사를 하느라 빚을 내기 일쑤였다.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綢繆補苴)”라는 말은 이런 사정을 말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서술은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라는 대목이다. ‘20이란 연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759년부터 형수가 세상을 버린 해인 1778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문장은, 주부로서 공인 이씨가 살아온 삶과 그녀의 내면적 심리 상황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내고 있다. 가족과 집안을 위해 죽으라고 일하고 애썼지만 가난은 늘 그 자리에 있어 공인 이씨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다는 것. 이 절망감과 좌절감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터이다.

 

노심초사하여 뼈 빠지게(嘔膓擢髓)”라는 말의 원문은 嘔膓구장이다. 이 단어는 嘔心抽膓구심추장이라는 말의 준말인데, 그 원래 뜻은 심혈을 토하고 창자를 뽑아낸다는 뜻이다. 연암은 온 몸을 바쳐 가족을 위해 헌신한 형수를 위해 이 말을 고르고 골라 썼을 터이다.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라는 말의 원문은 屈抑挫銷굴억좌소이다. 이 네 글자는 평생 가난에 찌든 공인 이씨의 심리 상태를 곡진하면서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축되다라는 뜻이고, ‘억눌리다라는 뜻이며, ‘꺾이다라는 뜻이고, ‘녹아 없어지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 네 글자는 가난으로 인한 공인 이씨의 좌절감과 절망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의 용례로는 넋을 잃다는 의미의 소혼銷魂’, 삭아 없어진다는 뜻의 소잔銷殘’, 녹아 없어진다는 뜻의 소훼銷毁등을 떠올려 볼 수 있는데, 이들 용례에서 짐작되듯 이 자는 절망감으로 마음이 소멸되어 버릴 것만 같은 심리 상황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니,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악화시켜 몇 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이렇게 본다면 공인 이씨는 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에 골병이 들어 죽은 셈이다. 연암은 형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 객관적으로 그려 보이고 있다. 비통한 마음을 억누른 채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스트로서의 연암의 면모가 이런 데서 잘 드러난다 할 것이다.

 

죽어가는 공인 이씨의 심리 과정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놓은 연암의 예리한 필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다음 문장, 매양 낙엽이 지고 추워지는 가을이면 형수님은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 병이 더욱 도졌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도 깊은 음미를 요한다. 이 문장에서 특히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라는 말에 눈을 줄 필요가 있다. 이 말의 원문은 廓然霣沮확연운저. ‘霣沮운저는 실망하거나 낙담한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문제는 그 앞의 廓然확연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휑뎅그렁하다’ ‘텅 비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삶에 대한 의지나 희망이 소진된 공인 이씨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연암은 바로 이 두 글자로써 희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공인 이씨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무섭지 않은가? 이토록 예리한 연암의 필치가, 연암의 글이 남다르다고 하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아아! 옛사람들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다. 조석朝夕도 보전키 어려운 상황에 놓인 기울고 망해가는 나라를 부지하며 조정에서 혼자 국사國事를 맡아 고군분투하듯 하셨고, 변변찮은 것이지만 정성스레 제수祭需를 마련해 선조의 혼령이 굶주리지 않게 하셨으며, 또 좋은 음식은 못 되더라도 음식을 장만해 손들을 잘 접대하셨으니, 이 어찌 이른바 온 힘을 다해 죽은 이후에야 그만둔다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내가 자식을 낳아 그 아이가 겨우 태를 벗었을 때 형수님은 그 아이가 사내인 걸 보고 마침내 양자養子로 삼으셨는데, 지금 열세 살이다.
夫弟趾源生子纔脫胞, 恭人視其男也, 遂子之, 今十三歲.

1~5까지는 형수의 일생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라면, “아아!”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형수에 대한 여암의 주관적인 평이라 말할 수 있다. 앞 단락에서 공인 이씨가 접빈객 봉제사하는 일에서 대가大家의 법도를 잃지 않았음을 말했는데, 이 단락은 그에 호응하여 공인 이씨를 약소국의 충신 내지 제갈공명에 견주고 있다.

연암은 특히 온 힘을 다해 죽은 이후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제갈량의 말로써 집안을 위해 고군분투한 형수의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6년 전인 1772년에 씌어진 이동필의 제문에 이미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연암은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의 제문 가운데서 형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형수는 집안에서 옛날의 충신과 같았으니 온 힘을 다해 그만두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이를 통해, 연암이 이 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형수를 옛날의 충신이나 제갈공명에 견준 것이 아니라 형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락은 그 뒷부분에서 의미가 전환되어, 연암이 자신의 맏아들인 종의宗儀를 형수의 양자로 들여보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대목은 1단락의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生三男, 皆不育)”라는 말과 호응관계를 이룬다. 연암은 왜 이 편의 끝에다 이 사실을 특기한 것일까? 이 점은 형수에 대한 연암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과정록의 기록부터 보자.

 

 

큰어머니(공인 이씨)는 혈육이 없이 돌아가셨다. 당시 나의 형님(연암의 맏아들)은 겨우 열 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어야 할 입장에 있었다. 큰아버지는 형님이 너무 어림을 민망히 여겨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상주 노릇을 하겠다. 좀 더 자란 다음 양자로 세워도 늦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연암의 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으며, 끝내 형님을 불러 상복을 입혀 상주 노릇을 하게 하셨다. 이를 보고 놀라 감탄하지 않는 조문객이 없었다. (146)

及伯母卒而無育, 吾先兄年甫十許歲, 當入系適嗣. 伯父閔其幼弱曰: “我主其喪矣. 姑待其成長而立之, 未晚也.”

 

 

당시 연암에게는 사내자식이라곤 종의 하나밖에 없었다. 둘째 아들인 종채는 1780년생이니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연암은 당시 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양자로 세워 큰집의 상주가 되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시집와 몇 십 년간 온갖 고생만 하다 자식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형수에 대한 연암의 애틋한 마음이 들어 있을 터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 대목은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간단히 서술되고 있지만, 형수에 대한 연암의 이런 마음이 그 바탕에 놓여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나는 화장산華藏山[각주:1]의 연암골에 새로 터를 잡아 그 산수를 어여삐 여기며 손수 가시덤불을 베어 내 나무 곁에다 집을 세웠다.
趾源新卜居華藏山中燕岩洞, 樂其水石, 手剪荊蓁, 因樹爲屋.
 
언젠가 형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형님이 연로하시니 장차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사셨으면 합니다. 담을 둘러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엔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문 앞에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심고, 시냇가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렵니다. 못에는 한 말 가량 치어稚魚를 풀어 놓고, 바위 절벽 밑에는 벌통 백 개를 놓아두며, 울타리 사이에 소 세 마리를 묶어 두렵니다. 제 처가 길쌈할 때면 형수님께선 그저 계집종이 기름 짜는 일이나 살펴 제가 밤에 옛 사람의 글을 읽을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甞對恭人言: “我伯氏老矣, 行當與弟偕隱. 繞墻千樹種桑, 屋後千樹栽栗, 門前千樹接梨, 溪上下千樹桃杏, 三畝陂塘, 一斗魚苗, 巖崖百筒蠭, 籬落之間, 繫牛六角, 妻績麻, 嫂氏但課婢趣榨油, 夜佐叔讀古人書.”
 
그 당시 형수님은 병이 몹시 위독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으로 머리를 가누고선 한 번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
그래서 밤낮 오시기를 바랐건만 그해 벼가 채 익기도 전에 형수님은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恭人時雖疾甚, 不覺蹶然起, 扶頭一笑謝曰: “是吾宿昔之志.” 所以日夜望, 其同來者甚殷, 禾稼未熟, 而恭人已不可起矣.
 
마침내 운구하여 그해 910일 집 북쪽 동산의 서북쪽을 등진 묏자리에 장사지내니, 형수님의 뜻을 이뤄 주기 위해서다. 그 땅은 황해도 금천에 속한다.
竟以柩歸, 以其年九月十日, 葬于舍北園中亥坐之兆, 所以成恭人之志也. 地系海西之金川.

이 단락에 이르러 문세文勢가 갑자기 전환된다. 앞의 1~7편까지의 서술이 진술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이 단락의 서술은 묘사적이다. 그 언어는 형상적이고, 이미지는 뚜렷하다. 연암은 자신과 형수 둘 사이에 있었던 어떤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글의 특정한 단락에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것은 연암 글쓰기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에피소드의 적절한 활용은 글을 생기 있게 만든다. 그렇다고 에피소드를 마구 늘어놓기만 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건 아니다. 연암은 일반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락과 에피소드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락을 잘 안배해 글을 구성함으로써 글의 문예미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동아시아의 문장가 가운데 에피소드나 일화를 잘 활용해 글을 쓴 최초의 인물은 아마도 사마천이 아닐까 한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일화나 에피소드를 통해 특정 인물의 개성과 본질을 생생하고도 예리하게 그려 낸 것으로 정평으로 나 있다. 사마천의 이런 글쓰기 방식을 계승한 문학 장르는 이다. ‘은 오늘날의 전기傳記와는 달리 대체로 아주 짧은 분량의 글인데, 한두 개 내지 두어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대상 인물의 성격적 특질과 인간적 본질을 극히 압축적으로 포착해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연암이 에피소드나 일화를 잘 활용한 데에는 사마천의 영향이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연암은 비단 이라는 장르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의 글에서 에피소드와 일화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묘지명에는 보통 에피소드를 서술하지 않는 법인데 연암의 이 묘지명은 그런 법식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이 점에서 파격적이다. 연암은 글쓰기에서 늘 법고창신法古創新(옛날 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법고창신이라 할 만하다.

 

 

 

 

 

  1. 화장산華藏山: 황해도 금천의 산 이름이다. [본문으로]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를 검토하며 자세히 살핀바 있지만, 연암은 1771년에 처음 연암협을 답사한 이래 이곳에 작은 산장을 지어 놓고 수시로 머물곤 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온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778년에 와서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는데, 연암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품고 장차 해코지를 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사정을 과정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 많다고 깊이 주의를 주셨다. 하루는 공이 조정에서 돌아와 수심에 잠겼다가 밤에 아버지를 찾아왔다. 공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엿본 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짐짓 늦추어 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아버지는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르며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셨다. 마침내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어 은둔코자 하셨다. 그리하여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들어가 두어 칸의 초가집에서 사셨다. (130)

兪相公彥鎬, 於先君, 知照最深. 每有事難處, 輒就咨於先君. 以先君言議峻激, 多觸忤權貴, 深戒之.

一日朝退, 忽憂愁不樂, 夜訪先君, 握手歎曰: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先君自念: ‘平日言議徑直, 名譽太盛, 所以招禍.’ 遂有斂影息跡之意. 於是挈家入燕巖峽, 結數椽艸屋而居.

 

 

이 기록으로 볼 때 이 단락에서 연암이 형수에게 한 말은 1777년에서 1778년 사이의 일로 보인다. 연암이 형수에게 그려 보이고 있는 연암협의 풍경은 몹시 평화롭고 안온하며 유복해 보인다. 한마디로 장밋빛 청사진이다. 그것은 일찍이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그려 보여준 바 있는 은자의 이상향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연암의 어조에는 과장이 느껴진다. 연암은 왜 과장하여 연암협을 미화한 걸까? 형수를 위로하고자 해서일 것이다. 연암은 형수의 평생소원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위독한 형수에게 그녀의 소망이 실현된 공간을 그려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과장된 어조에는 형수를 보는 연암의 착잡하고 애틋한 시선이 감춰져 있다 하겠다.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형수는 몹시 위독했지만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으로 머리를 가누고선 한 번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 단락에서뿐만 아니라 이 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우리 눈에 박힌다. 20여 년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힘이 소진하여 절망과 좌절감 속에 죽어가고 있던 형수에게 연암이 들려준 말은 그 말만으로도 기쁘고 가슴이 벅찼으리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한 번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것이리라.

 

사실 이 글 전체에서 형수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 발언한 것은 이 대목 한 군데밖에 없다. 비록 앞 부분에서 공인 이씨에 대해 많이 서술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암의 진술일 뿐이었다.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 이 말은 형수가 잠시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 독자에게 육성을 들려준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독자에게 아주 강하고 인상적인 울림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리고 그 울임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온 여인의 삶과 운명과 꿈을 한꺼번에 환기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

이처럼 이 단락의 전반부는 연암의 과장된 말과 그로 인한 공인 이씨의 잠시 기뻐하는 낯빛으로 인해 앞 단락들과는 달리 환하고 밝은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대조 때문에 이 단락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든다.

 

공인 이씨의 산산한 삶은 마침내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연암은 벼가 채 익기도 전에(禾稼未熟)”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벼가 채 익기도 전에라는 이 표현이 우리 마음을 다시 툭 건드린다. 공인 이씨는 연암협의 집 북쪽 산기슭에 묻힌 모양이다. 이북以北에 지금도 그 묘가 남아 있을까? 언젠가 꼭 확인해보고 싶다.

공인 이씨를 연암협에 장사 지낸 것을 두고 형수님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서다(所以成恭人之志也)”라고 했는데, 이 말은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라는 말과 호응을 이루는바, 형수에 대해 연암이 느껴 온 미안함과 복잡한 심경을 그 속에 담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나는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유언호俞彦鎬에게 묘지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마침 개성 유수로 와 있었는데 개성은 연암골에서 가까웠다. 그는 장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명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이라 그 골짝은,
산 깊고 물 맑은데,
시동생이 유택幽宅을 마련했지요.
아아! 온 가족이 함께 은거하려 했거늘,
마침내 이곳에 머무시게 됐군요.
계시는 곳 편안하고 굳건하니,
아무쪼록 후손들 보우하소서.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묘지명의 은 대개 한 사람이 짓는 법인데, 이 글에서는 는 연암이 짓고 은 유언호가 지었다. 이 점, 파격적이다. 아마 당시 장례를 치를 때 연암은 유언호에게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11. 총평

 

 

1

공인 이씨가 열여섯에 시집올 때는 꽃다운 얼굴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내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파리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품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아픈 몸을 일으켜 빙긋이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하는 데서 그녀의 인간 됨됨이와 기품이 느껴진다.

 

 

2

이 글은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 온 여성에 대한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연암 외에도 빈사처貧士妻의 생애를 기록한 문인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연암의 이 글처럼 그런 여성의 내면 풍경과 심리 상황까지 냉철하게 그려 보인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은 가난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한 여성이 절망과 낙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놓고 있다.

 

 

3

우리가 기억하는 연암가의 여자들은 공인 이씨 외에도 연암의 큰누이, 연암의 아내 등이 있다. 이 세 여인은 모두 빈사貧士의 처로서, 신산한 삶을 살다 죽었다.

연암의 아내178751세로 세상을 떴다. 연암은 친구 유언호의 도움으로 1786년 처음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을 하나 얻어 하게 된다. 연암의 아내는 연암이 벼슬을 얻은 지 1년 만에 세상을 떴으니 그녀 역시 가난 속에 고생만 실컷 하다 죽었다 할 만하다. 연암은 평소 아내의 인품을 존경했으며, 아내가 죽자 애도하는 시 20수를 지었다. 그리고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연암은 첩도 둔 일이 없다. 재혼도 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은 연암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퍽 이례적인 일이다.

연암의 이런 태도는 이 글이 보여주듯 집안의 여성들을 보면서 연암이 느껴 온 미안한 마음 및 감사하는 마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어찌 생각하면 연암의 형수나 아내와 같은 여인들의 고생 위에 연암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연암을 기뻐하는 자, 이 여인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유순하다거나 바르고 정숙하다거나 부지런하고 검소하다는 등의 글자는 단 한 자도 없지만, 선조를 받들고 살림살이를 하는 공인恭人의 모습이나 자애롭고 온순한 그 덕성을 마치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지극히 진실하고 지극히 맑은 글이라, 읽으면 슬프게 사람을 감동시킨다(無一婉嫕莊淑勤儉等字, 而恭人之奉先御家友慈和順之德, 像想如見. 要是至眞至潔之文, 讀之悽惋動人).”

또 이런 평도 남겼다.

옛날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가난한 것이지 병든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요즘 가난한 선비 집 규방의 아낙들에겐 가난이 곧 병이고 병이 곧 가난이 되니, 이 둘은 얽히고설킨 채 뒤엉켜 있으니 도무지 풀 수가 없다. 백 사람이 같은 증세이고 천 사람이 한결같은 병증病症인데, 간혹 진찰 끝에 그 원인을 알아내더라도 그것을 풀이해놓은 묘방妙方이 없고, 비록 뭐라고 풀이해놓은 묘방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처방할 명의名醫가 없다. 동전을 끈에 꿰어 비단구렁이처럼 똬리를 틀어 놓고 비단을 상자에 담아 두고 곡식을 창고에 들여놓은 후 그것들에 손을 한 번 갖다 대기만 하면 아픈 것이 씻은 듯이 싹 없어지고, 눈을 들어 그것들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심장을 보하고 비위를 돋우어 다 죽게 되었다가도 도로 살아난다. 이것이 바로 가장 좋은 약이다. 사슴의 뿔을 자르고 갓난아이 모양의 신령한 산삼이 있다 해도 이들 부인의 병을 고치는 데는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이다(昔原憲言, 貧也非病, 近世寒士, 閨閤中人, 貧則是病, 病則是貧, 纏綿膠漆, 莫可解釋. 百家同證, 千人一祟, 往往診察, 得其源因, 而無妙文, 爲之詮錄, 雖有詮錄, 如此妙文更無, 國醫爲之處方. 鑄銅貫綖, 若繡蟒蟠, 布帛開箱, 米糓入倉, 以手一摩, 痛苦如失, 擧目一見, 補心歸脾, 起死回生. 斯爲上藥. 鹿頭截茸, 神葠如嬰, 瘳此婦人, 如水投石, 此出藥王菩薩, 救苦眞經.).”

한편,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메마른 제목을 가지고 윤택한 글을 지었다. 생동감이 있는 데다가 글 끝에 와서 기세가 갑자기 꺾이는 수법을 보여주니, 대체 이 어떤 솜씨란 말인가?”라고 평한 바 있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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