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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 17. 소완정 기문 본문

책/한문(漢文)

연암을 읽는다 - 17. 소완정 기문

건방진방랑자 2020. 3. 3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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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총평

 

 

1

이 글은 연암이 그 제자인 이서구에게 독서의 방법을 설파한 내용이다. 아마도 연암은 이서구의 독서 태도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기에 이런 의론을 펼쳤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의 의의는 그런 쪽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글의 의의는 연암이 자기 시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암 당대의 조선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독서법이 있었으니, 하나는 성리학적 독서법이고, 다른 하나는 고증학적 독서법이며, 또 하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이었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연암의 시대에만 있던 독서법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왔던 독서법이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성리학을 하는 데 긴요한 책들의 목록을 정해 놓고 그 책들만을 읽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외의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봤으며, 성리학 이외의 사상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독서가 금지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적 독서법은 몹시 편협하고 교조적이었던바, 독서가 실제 현실과 연결되기 어려웠다. “동중서처럼 방에 콕 틀어박혀 책을 읽는다는 비유는 이 성리학적 독서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고증학적 독서법은 청나라 고증학이 조선에 수용되면서 새롭게 대두된 독서법이다. 이 독서법은 박학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었다. 이 점에서 이 독서법은 성리학적 독서법과는 사뭇 다르며, 성리학적 독서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고증학적 독서법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았다. 성리학적 독서법에서 관념의 과잉이 문제였다면, 고증학적 독서법은 거꾸로 이념의 결여가 문제였다. 이 독서법은 학문이나 사상을 생활 세계와 분리시켜 몰가치적인 관점에서 봤다. 이 때문에, 교조주의와 사변성에 빠져 있던 성리학적 독서법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현실과의 유리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이 독서법은 종종 지적 도락주의道樂主義나 쇄말주의瑣末主義 아니면 현학주의에 빠지곤 하였다. 그래서 폭넓고 잡다하기는 하나 간요簡要함을 결여하였다. “장화張華 같은 박람강기에 의지하고운운한 말은 이런 고증학적 독서법을 비판한 말일 수 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은 과거 시험에 소용되는 책을 달달 외는 것이었다. 이 독서법은 마음을 비운 채 하는 독서와는 정반대의 독서법일 터이다. “동방삭처럼 글을 달달 외운다고 한 것은 이런 독서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연암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취하고 있던 이 세 가지 독서법을 모두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독서를 사물 및 현실 세계와 긴밀히 연결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압하지 않고 활짝 열어젖힘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연암이 제기한 이런 독서법은 실학적 독서법이라 이름할 만하다. 연암이 주창한 실학적 독서법은 심미적이면서 실천적인 면모가 강하다.

 

 

2

연암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취했던 이런 독서법으로는 창조적 글읽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창조적 글읽기가 안 되면 창조적 사고도 나오기 어렵다. 창조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조적인 글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글읽기는 결국 글쓰기의 문제와 직결된다. 연암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의고주의擬古主義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잘못된 독서법에서 연유하는 면이 없지 않다. 창조적 글읽기가 안 되면 결국 읽은 것을 흉내 내거나 본뜨는 쪽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연암 득의의 창작 방법론인 법고창신론은 연암이 주창한 주체적ㆍ심미적 독서법과 상관관계가 없지 않다.

연암의 시대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창조적ㆍ주체적 독서를 하고 있는가? 혹 연암이 비판한 바로 그 독서법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외국 이론을 산만하고 무비판적으로 읽고서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 한 창조적 사고와 창조적 글쓰기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연암의 독서법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3

연암은 본래의 선비原士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독서하여 곧바로 어디에 써먹으려 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다. 평생토록 글을 읽어도 배움이 진전되지 않는 건 바로 이 사사로운 마음이 해를 끼쳐서다

讀書而求有爲者, 皆私意也. 終歲讀書而學不進者, 私意害之也.

 

 

4

이 글에서 연암은 책(혹은 글)이라는 텍스트를 사물이라는 텍스트, 현실이라는 텍스트, 자연이라는 텍스트와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 짓고 있다. 그리하여 연암에게 있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와 현실과 자연을 읽는 행위가 된다. 이처럼 연암에게 있어 텍스트는 책 혹은 글에 한정되지 않고 그 바깥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책 바깥의 텍스트를 환기하는 일이 된다.

 

 

5

이 글은 연암의 논리력과 사유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6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묘하다는 평을 붙인 바 있다.

 

 

더보기

세상으로 책을 보고 마음을 비움으로 완미하라

素玩亭記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문제점

完山李洛瑞, 扁其貯書之室曰素玩, 而請記於余.

余詰之曰: “夫魚游水中, 目不見水者, 何也? 所見者皆水, 則猶無水也. 洛瑞之書盈棟而充架, 前後左右無非書也, 猶魚之游水. 雖效專於, 助記於, 借誦於東方, 將無以自得矣, 其可乎?”

 

책에서 둘러싸인 환경에서 나오라

洛瑞驚曰: “然則將奈何?”

余曰: “子未見夫索物者乎? 瞻前則失後, 顧左則遺右. 何則? 坐在室中, 身與物相掩, 眼與空相逼. 故爾莫若身處室外, 穴牖而窺之, 一目之專, 盡擧室中之物矣.”

洛瑞謝曰: “是夫子挈我以.”

 

해가 불꽃이 되려면 관조를 통해 모아져야 한다

余又曰: “子旣已知約之道矣. 又吾敎子, 以不以目視之, 以心照之可乎. 夫日者, 太陽也. 衣被四海, 化育萬物, 濕照之而成燥, 闇受之而生明. 然而不能爇木而鎔金者, 何也? 光遍而精散故爾. 若夫收萬里之遍照, 聚片隙之容光, 承玻璃之圓珠, 規精光以如豆, 初亭毒而晶晶, 倐騰焰而熊熊者, 何也? 光專而不散, 精聚而爲一故爾.”

洛瑞謝曰: “是夫子警我以悟也.”

 

평소엔 완미하는 방법은 비움에 있다

余又曰: “夫散在天地之間者, 皆此書之精. 則固非逼礙之觀, 而所可求之於一室之中也. 包犧氏之觀文也, : ‘仰而觀乎天, 俯而察乎地.’ 孔子大其觀, 文而係之曰: ‘㞐則玩其辭.’ 夫玩者, 豈目視而審之哉? 口以味之, 則得其旨矣; 耳而聽之, 則得其音矣; 心以會之, 則得其精矣.

今子穴牖而專之於目, 承珠而悟之於心矣. 雖然, 室牖非虛, 則不能受明; 晶珠非虛, 則不能聚精. 夫明志之道, 固在於虛而受物, 澹而無私, 此其所以素玩也歟.”

洛瑞: “吾將付諸壁, 子其書之.” 遂爲之書. -孔雀舘文稿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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