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나무도 없는 집인데 죽원옹이란 호를 짓다
사함士涵 유한렴劉漢廉이 죽원옹竹園翁이라 자호하고 거처하는 집에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걸고는 내게 서문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집에 올라보고 그 동산을 거닐어 보았지만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의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이 아니겠는가?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이거늘, 나더러 장차 손님을 위하란 말인가?” 사함이 머쓱해져서 한동안 있더니만, “애오라지 스스로 뜻을 부쳐본 것일 뿐이라오.”라고 하였다. 士涵自號竹園翁, 而扁其所居之堂曰不移, 請余序之. 余嘗登其軒, 而涉其園, 則不見一挺之竹. 余顧而笑曰: “是所謂無何鄕烏有先生之家耶? 名者實之賓, 吾將爲賓乎?” 士涵憮然爲間曰: “聊自寓意耳.” |
유한렴劉漢廉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 짓고, 집에는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내 걸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집에는 대나무 동산은커녕 한 그루의 대나무도 구경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호를 죽원옹이라 했을까? 불이당不移堂이라니, 무엇을 옮기지 않는 집이란 말인가?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 사는 ‘죽원옹’과, 어떤 역경에도 옮기지 않을 뜻을 기르는 ‘불이당’을 위해 연암은 붓을 들었다.
무하유無何有의 마을, 즉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은 마을에 사는 오유선생烏有先生이란 이름만 있고 실지는 없는 허깨비 선생이란 말이다. 여보게, 죽원옹! 자네의 대나무 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의 굳센 뜻은 어디에 있는가? 실지가 없는데 이름만 내걸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머쓱해진 죽원옹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한다. “뭐 꼭 대나무 동산이 있대서 지은 이름은 아닐세. 그저 그렇듯이 곧은 절개를 지녀 환난 속에서도 변치 않을 정신을 지켜가고픈 마음을 담은 것이라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이를 채워 줌세. 지난번에 학사 이양천李亮天이 한가롭게 지내며 매화시를 지었는데, 심사정沈師正의 묵매墨梅를 얻어 시축詩軸에 얹었더랬네. 인하여 웃으며 내게 말하지 않겠나. ‘심하도다! 심씨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능히 사물과 꼭같게만 할 뿐이로다.’ 내가 의아해서 말했지. ‘그림을 그리면서 꼭 같게 그린다면 좋은 화가일터인데, 학사께서는 어찌 웃으십니까?’ 余笑曰: “無傷也. 吾將爲子實之也. 曩李學士功甫, 閒居爲梅花詩, 得沈董玄墨梅以弁軸. 因笑謂余曰: ‘甚矣! 沈之爲畵也. 能肖物而已矣.’ 余惑之曰: ‘爲畵而肖, 良工也. 學士何笑爲?’ |
그러자 연암은 자신의 「불이당기」를 가지고 죽원옹과 불이당의 이름에 실지를 채워 주겠노라고 장담한다. 이하의 글은 인용문 속에 인용문이 들어 있고, 그 인용문 속에 또 다시 인용문이 들어 있는 중층 구조의 복잡한 내용이다. 자칫 하다간 말하는 주체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비약하여 이학사의 이야기로 건너뛴다. 이학사는 바로 연암의 처숙부 되는 이양천李亮天(1716-1755)이다. 그가 한가롭게 지낼 때 지은 매화 시축詩軸의 앞머리에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어 얹은 일이 있었다. 핍진한 매화를 그려온 그 그림을 한참 보던 이학사는 까닭 없이 실망감을 나타내 보인다. “쯧쯧! 이 사람 그림은 늘 이 모양이라니까? 그저 사물과 꼭 같게만 그리려 드니 말일세.” “아니, 화가가 그리려는 사물을 꼭 같게 사생寫生해 낼 수 있다면 훌륭하다 아니 못할 터인데, 어째서 핍진한 것을 비웃으십니까?”
▲ 전문
인용
3. 위급한 위리안치 중에도 임금을 걱정한 이양천의 절개
4.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보면 눈 속 잣나무가 보인다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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